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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Feb 17. 2024

나쁘지 않아

2024년 2월 17일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는 일이 흔한가? 이상하게 나는 늘 그래왔다. 그녀들은 항상 다시 연락을 해온다. 이별하고 몇년쯤 지난 뒤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하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관계가 몹시 좁고, 그래서 물어볼 사람이 별로 없다. 몇 안되는 사람도 물어보면, 왜 그런 걸 묻지, 하는 시선과 함께 아니요, 라는 사무적인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그렇군요. 대화는 거기서 뚝 끊긴다. 망치로 못을 박듯. 나무 속으로 쏙 들어간 못은 다시 튀어나오지 않는다. 당연하다.


대화는 참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숨쉬듯 한다. 적당한 화제를 찾고,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농담을 섞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간다. 그게 얼마나 축복받은 재능인지 그들은 모른다. 모르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 말고도 모르고 넘어가는 게 많다. 가진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없는 사람만이 기억한다.


나는 없는 게 많다. 그래서 기억하는 것도 많다. 부끄러운 상황 같은 거. 농담을 했는데 아무도 웃지 않는다든지, 말을 걸었는데 대꾸하지 않는다든지,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말하면 하나 같이 부정적인 피드백이라든지. 그런 상황이 반복된다. 나 같은 사람은 혼자 사는 게 건강에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참을 수가 없다. 나자신의 타고난 성정. 그게 가장 힘든 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몇 번 연애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네 번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까. 이런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게 연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괜찮다. 사랑은 저마다 모양이 다르니까. 누군갈 만나는 이유는 여러가지 일수도 있고, 딱 하나뿐일 수도 있다. 따지고보면 재력이나 외모만으로 누군갈 만나는 것이나, 연민으로 만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물론 끝에 가서는 항상 차였다. 연민은 꽤 힘이 세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멀리서보면 희극, 가까이서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들은 멀리서 나를 보고 슬픔과 연민을 느껴 다가오지만, 막상 가까이 지내다보면 점점 우습고 하찮게 여긴다. 지긋지긋해한다.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과 같이 있다보면 자기도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은 있지만, 견디는 사람은 없다. 나중엔 결국 번뜩 정신을 차린다. 내가 지금 뭘하고 있지? 그런 생각이 들면 내게 이별을 통보한다. 음, 때가 됐구나. 나는 수긍한다.


한번도 그런 상대를 미워한 적 없다. 오히려 그렇게나 오래 –보통 일 년 남짓- 나를 만나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들은 보통 곁에서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 이럴 때는 이러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런 말은 굳이 하지 말지. 옷은 이런 걸 좀 입어봐. 좀 더 분위기를 파악해보라고. 나는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당연히 어렵다. 사람이 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슬슬 그녀들은 지치고, 피곤해한다. 언제까지 이런 걸 챙겨줘야 하나,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해한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아무 것도 원망하지 않는다. 다가온 인연에 감사하고, 떠나는 인연도 감사한다. 평생 모태솔로로 살 줄 알았는데, 아닌 게 어딘가.


나중에 다시 연락이 온다. 헤어지고 몇 년 뒤에. 당연히 나는 그녀들의 연락을 무시하지 못한다. 휴대전화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긴장한다. 설렌다. 연민이 돌아온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다시 나를 떠올린 것에 감사한다. 누군가 날 생각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타인의 마음 속에 잠깐이라도 머무를 수 있는 게 얼마나 가슴 벅차게 환상적인 일인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그렇게 약속 장소로 나간다.


우리는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아니, 거의 일방적으로 그녀들이 이야기를 한다. 나는 주로 듣는 쪽이다. 음, 그랬구나, 그렇게 지냈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녀들은 종종 내 안부를 묻기도 하지만 딱히 결정적인 질문은 아니다. 길에서 우연히 예전 직장 동료와 마주쳤을 때 할 법한 안부 인사. 그보다는 자기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상하게도 그녀들은 하나 같이 몹쓸 남자를 만난 뒤다. 겉만 번지르르 하고 실속이 없는 남자, 마음 속에 숨겨둔 감정을 뒤늦게 표출하는 남자, 오락가락하며 여러 여자를 만나는 남자... 그런 남자들 이야기를 한다.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그런 질문을 해본다.

너는 소설을 쓰니까. 이런 이야기 좋아하지 않아?

아하.

다른 걸 기대했어?

우리가 다시 잘 되는 거? 아니면 혹시 오늘 같이 자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 하하하.


물론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은 없다. 속으로 삼킨다. 나는 수동적인 사람이니까. 언제 어디서나 내 역할은 떠앉는 것이다. 그녀들이 떠미는 구정물을 삼키고 입을 다무는 것. 그녀들은 털어놓고 나서 무척 개운해한다. 너는 얘기를 잘 들어줘서 참 좋아. 그런 말이라도 들으면 나는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실실 웃는다. 우리는 두어번 정도 더 만난다. 그리고 연락이 뚝 끊긴다. 말했던 것처럼 못이 박힌다. 쾅. 나의 쓸모는 거기서 끝난다.


어젯밤에도 나는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났다. 금요일 저녁, 합정역 할리스에서. 거의 1년 만이었다. 나는 네시간 가까이 그녀의 전남친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프랑스 남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남자에 대한 편견은 없는데, 정말이야, 편견은 없어, 하지만 실제로 겪은 걸 아니라고 할 수는 없잖아? 걔네들은 자는 걸 데이트 코스의 하나로 생각하더라고, 사귀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많이 만나고, 잤는데도 사귀는 게 아니었어, 그런 줄은 나도 몰랐지. 응,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프랑스 남자를 만났구나. 그랬다니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말이야, 그렇지? 맞아, 정말 그랬겠네, 어이가 없었겠네. 응, 그렇다니까, 너는 참 잘 들어줘서 좋다.


우리는 새벽녘에 헤어졌다. 다음 주말에는 뇨끼를 잘하는 음식점에 갔다가, 시간이 괜찮으면 심야 영화를 보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약속은 아마 목요일이나 금요일 저녁쯤 취소될 것이다. 미안, 주말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래, 알겠어, 시간될 때 다시 얘기해줘. 그리고 그녀는 아마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슬프지 않다. 그게 나의 쓸모고, 역할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정말이다. 나쁘지 않다. 그런 일은 아주 흔하고, 흔해빠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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