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이야기
외할머니는 말년을 안산의 한 요양원에서 보내셨다. 몸이 불편하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외할머니를 근처에 사는 외삼촌이 돌보셨다. 나는 아주 가끔 어머니와 함께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찾아와도 대부분 주무시고 계시거나 깨어나셨어도 우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셨다. 나를 보면 "누구냐?" 하고는 사촌형의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뭐하러 와. 여기 올 시간에 가서 일해야지."
할머니는 정신이 좀 더 멀쩡하실 때도 우리가 찾아가면 늘 저렇게 말씀하셨다. 평생 자식들을 먹여 살리시고 자식들이 결혼하고 나서는 손주들까지 키워주고 챙겨주시느라 애쓰셨던 할머니. 할머니는 일평생 가족들을 위해 일만 하셨다.
"기술이 있으면 절대로 굶지 않는다."
할머니가 늘 가족들에게 강조했던 말씀이셨다. 가난했던 시절 당신의 자식들을 키워내기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사셨던 당신의 인생철학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 여자들이 정신대에 끌려간다는 소리가 마을에 횡행했고, 당시 처녀였던 할머니는 서둘러 누군가와 혼인을 해야 했다. 큰이모가 태어났고, 해방 후 몇 년이 지나 6.25 사변이 터졌을 당시 첫 남편은 사라졌다. 그 후 이북에서 넘어온 외할아버지와 재혼하셨다. 그리고 큰외삼촌과 어머니, 작은 외삼촌, 작은 이모가 태어났다. 그 위로 첫째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병으로 일찍 죽었다고 한다. 병원에 가기도 녹록치 않았지만 죽을병인지 아닌지도 쉽게 알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큰외삼촌을 유독 아끼셨다 한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그런 할머니를 야속해했다. 큰외삼촌은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으나, 사춘기시절 기타에 빠지면서 점점 학업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큰외삼촌을 몽둥이로 마구 패기 일쑤였다. 할머니는 그 사이에서 큰외삼촌을 두둔했으나, 할아버지와 큰외삼촌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큰외삼촌은 담배와 술을 입에 대며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쌀집을 운영하셔서 어머니네 가족들이 먹고 사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 시절 귀하다는 고기 반찬도 자주 밥상에 올라왔다. 그렇다고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가족들 먹는 것만큼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 동의하신듯 했다. 할머니가 큰외삼촌에게만 유독 정성을 쏟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해 다른 형제자매들도 별 탈 없이 자랐다.
할아버지는 한량기질이 다분하셨다고 한다. 말주변이 좋아 날이 어둑해지면 동네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고, 할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술판에 가족들은 괴로워했지만 가부장적인 그 시절 분위기를 거슬러 할아버지를 만류하기엔 가족들 모두 역부족이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술주정을 특히 싫어하셨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국토 개발 사업 과정중에 국가가 헐값으로 강제 토지 매입을 했고, 그 틈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로 인한 분노로 연일 술을 달고 사셨고, 어느날 한낮에 갑자기 졸도하시더니 그대로 돌아가셨다. 뇌출혈이었다. 어머니가 대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그 때부터 집안 경제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가족들 모두 각자 살 길을 찾아 열심히 뛰어야 했다.
다행히 할머니의 자녀들 모두 결혼했고.. 당분간 안정을 찾았다. 그러다 내가 태어났고, 어머니가 중학교 근무를 시작하면서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셨다. 부모님이 모두 출근을 마치시면 나는 할머니를 따라 이웃집으로 놀러가 그 집 아이네 장난감을 갖고 놀곤 했다.
어릴때 나는 편식이 심해서, 할머니는 나에게 밥을 먹이는 것도 힘겨워하셨다. 지금도 내가 맛있게 먹는 집밥 반찬이나 요리는 그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것들이 많다. 메추리알 장조림, 소고기 미역국, 버터계란간장밥, 김치수제비 등등. 나중에 나이 들어서 듣게된 바로는 밥투정 반찬 투정이 너무 심해서 할머니가 이것저것 만들다 우연히 내가 꽂힌 것(?)들이 바로 저 메뉴들이라고 하더라. 내 기억에도 내가 할머니께 심하게 반찬투정을 한 기억이 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뭔가 속상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그렇게 반찬투정으로 푼 것 같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어떻게든 정성껏 내 비위(?)를 맞춰주셨다. 편식이라니,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식성 스펙트럼이 광범위한 지금의 나를 보면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거다.
어느 날부터 우리집엔 할머니의 어머니, 즉 외증조할머니가 오셨다. 사실상 환자셨다. 누워만 계셨는데 아마 치매끼가 있지 않았나 싶다. 할머니도 당신의 어머니께 속상한 마음이 있었는지, 어느날 두 분이 방에서 함께 우시는 걸 들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어머니께 "같이 죽읍시다" 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죽으려고 하는건가, 덜컥 겁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증조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뒤로 몇 년이 지났다. 언젠가부터 할머니가 집에 안계실때가 많았다.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며 키우셨던 큰외삼촌은 결혼하고 나서도 술에 빠져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외숙모랑 별거중인 상태였다. 할머니는 남겨진 아이들 - 나에겐 사촌형과 누나 - 을 돌보기 위해 자주 큰외삼촌댁으로 가셨다. 일주일의 반 정도를 큰외삼촌댁, 나머지 반을 우리집에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셨던 셈이다. 허리가 굽어 걸음걸이도 편치 않으셨던 분이 서울과 안산을 왔다갔다 하셨다. 자가용은 커녕 대중교통을 타려고 해도 한참을 걷고 중간에 갈아타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큰외삼촌이 위독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술에 쩔어 사느라 그랬는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그랬는지..간암 말기라고 했다. 처참한 몰골에 충격을 받을까봐 어머니는 큰외삼촌 임종의 순간에 나와 누나는 데려가지 않으셨다.
나중에 어머니 가족과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할머니가 큰외삼촌만 편애하셨는데 정작 동생들이 더 잘 살고 큰외삼촌이 나락으로 떨어진 걸 보고 할머니 마음이 참 아프셨을 거라고..어머니와 작은이모, 작은외삼촌과 큰이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을거라고.. 그와 동시에 큰외삼촌이 왜 그렇게 됐을까 너무 불쌍했을거라고.. 이건 내 생각인데 어쩌면 할머니는 큰외삼촌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가장 여리고 연약하다는 것을 미리 아시지 않으셨을까 싶다.
큰외삼촌이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사촌형과 누나의 부모 역할을 위해 아예 안산으로 내려가셨다. 우리집엔 내가 초등학교 방과 후 일찍 집으로 돌아온 날에만 오셨다. 기억에 수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할머니께 꼭 김치 수제비를 해달라고 말씀 드렸다. 할머니는 오실 때마다 김치 수제비를 해주셨다. 할머니는 내 입맛에 맞게 김치 수제비를 엄청 얇게 만들고 국물도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매콤하고 깊은 맛을 내셨다. 수제비를 입에 넣으면 그대로 혀에 스르륵 녹아 없어질만큼 부드러웠다. 할머니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너무 얇으면 다 풀어지기 때문에 풀어지기 딱 직전까지 얇게 만드는 기술. 나는 수제비를 먹으며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를 보곤 했는데 그래선지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먼나라이웃나라 만화책엔 군데 군데 수제비 국물이 묻어 있었다.
할머니가 안오신 날엔 식탁에 돈이 놓여 있었고... 나는 크게 실망하곤 했다. 집 앞 다전국수, 장터국수집에서 국수를 사먹곤 했는데 그 날은 언제 또 할머니가 오시나 어머니께 물어봤다. 할머니가 오시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큰외삼촌네 사촌형과 사촌누나를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힘드셨으리라.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여기까지였다. 그 후로 할머니는 거의 뵙질 못했다. 어쩌다 한 번 할머니를 만나러 가면 할머니는 그 때마다 나에게 수제비 해줘야 하는데,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해가 갈수록 할머니는 건강이 나빠지셨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큰외삼촌댁 뿐 아니라 작은 외삼촌댁에도 가서 아이들을 챙겨주시느라 늘 바쁘셨다고 한다. 큰외삼촌 작은 외삼촌 댁 아이들이 모두 자라 성인이 된 후에도 여기저기 당신의 자식들 집안일을 도맡아 하시느라 바쁘셨다. 작은이모댁에도 가고 큰이모부댁에도 가고..모든 집에 할머니가 해결해야 할 일들이 늘 있었다.
한참 후에 다시 할머니를 뵙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건강이 너무 안좋아지셔서 더이상 어디에도 가기 힘들어하셨다. 병원에서 뵐 때가 많았는데 병원에서도 우리가 찾아가면 늘 이모 외삼촌들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셨다. 이제는 할머니 본인의 건강을 챙기셔야 할 때인데도 할머니는 자식 손주들 일 해결하는데 평생을 다바치셔서 본인을 챙길 방법도 모르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릴때 나와 누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성인이 되고 오랜 시간 못봤던 할머니는 내게 이미 먼 친척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장의사가 와서 염을 하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할머니가 이렇게 작으셨구나..내가 아이였을땐 그런 느낌이 안들었었는데..이 작은 몸으로 그렇게 힘들게 온 동네 자식 손주들이 사는 곳을 뛰어 다니셨구나..
내가 밥 안먹고 반찬 투정할 때마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날계란 버터 간장 비빔밥. 뜨거운 밥에 버터를 넣고 녹여 날계란과 간장을 넣어 만든 밥. 내가 지금도 가끔씩 만들어 먹는 별미다. 메추리알 장조림은 언젠가부터 찾아 먹기 힘든 반찬이 되었다. 할머니 전매 특허인 김치 수제비는 더이상 세상 누구도 만들 수 없는 메뉴가 되었다. 진하고 깊은 맛의 멸치 김치 국물, 그리고 입에 넣자마자 녹는 얇디 얇은 밀가루 수제비.. 언젠가 그 맛을 기억해서 내가 직접 만들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아직 엄두는 나지 않는다.
평생 고생하고 힘들게 사셨지만, 그 덕분에 자식 손주들 모두 잘 살게 되었으니 할머니는 뿌듯하게 여기고 가셨을 거라 믿고 싶다. 나는 요즘도 가끔 식당에서 김치 수제비 메뉴를 발견하면 할머니를 떠올린다. 물론 그 맛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