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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1991 설날

by rextoys

아마 1991년이었을 거다.


설 하루 전, 아침 일찍 가족 모두 차를 타고 전북 남원을 향해 출발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후 초반엔 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으나, 대전 부근? 중간 지점을 넘어서면서부터 멀리 차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엔 근심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차 라디오에선 아나운서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귀성길 행렬로 정체가 심해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나는 상관 없었다. 창 밖을 바라보다 잠이 들고, 깨보면 휴게소였다. 휴게소에선 호두과자와 우동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 때 먹은 우동 맛에 길이 들어 요즘도 어쩌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들르게 되면 우동 하나는 꼭 주문해 먹게 된다.


운전대를 잡으신 아버지는 고달프셨겠지만, 철 없던 나는 은근히 정체가 길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길이 막힐수록 휴게소가 나올 때마다 들른다는 것을 알아챘으니까. 전주를 통과해 고속도로를 벗어나 길이 훤히 뚫려 씽씽 달리기 시작했을 때,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목적지인 큰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우리는 어떤 콩나물 국밥집에 들렀다. 함께 내려온 작은 아버지댁 식구들과 만나는 장소였다. 국밥을 먹으면서 나는 어른들이 갈색의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국 같은 것을 마시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우유를 마시면 입술에 크림처럼 우유 잔사가 묻어나듯, 국물을 마신 어른들의 입술에 갈색 크림 같은 것이 묻어났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어른들께 여쭤보니 '모주'라고, 술이라 애들은 마시면 안된다고 하셨다.


친척들이 모인 큰 집은 100년된 한옥집이었다. 화장실은 바깥 똥뚜간이었고, 바깥마루 옆에 세워진 수도꼭지를 틀면 손도 댈 수 없을만큼 차가운 물이 흘렀다. 방 두 개와 부엌 하나, 다락방이 전부인 좁은 한옥집에 네 가족이 모였다. 바깥이 어두워지자 작은 방에 아이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온돌 땐 바닥에 엎드려 담요를 덮은 채로 티비를 봤다. 명절이 되면 철인28호, 독고탁, 율리시스같은 만화가 방영되곤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만화를 보며 우주의 미아가 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다.


곧 저녁상이 나왔다. 그 좁은 방 안에 큰 상을 차려놓고 두 가족씩 나눠서 식사를 했다. 나는 명절날 먹을 수 있는 전과 굴비, 전라도식 김치를 좋아했다. 전 부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따위는 모르던 시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어른과 아이들이 모여 윷놀이 게임을 했다. 어른들이 고스톱을 치셨는데 그 때 옆에서 나도 살짝 배웠다. 밤 늦게 잠자리에 들기 전 똥뚜간에 볼 일 보러 가느라 고생한 기억도 난다. 어른 누가 함께 가주셔서 라이트로 비추고 서 계셨던 것 같은데...


이튿날 설 당일. 떡국상을 먹고 상을 치운 후 아이들의 마음 속엔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올랐다. 빳빳한 세뱃돈을 받는 코너(?)가 대기하고 있기 때문. 어제 말 편히 놓고 수다 떨었던 고모도 아침이 되면 어려운 사람(?)이 된다. 모든 아이들이 손을 공손히 모으고 수금할, 아니 세배할 차례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줄서서 설레는 마음으로 세배 차례를 기다렸다. 세배를 하고 덕담을 들은 후 손에 받아든 봉투 속 빳빳한 돈. 새 지폐에서 피어올랐던 그 돈 냄새(?)는 참으로 그윽했다.


작은 아버지와 고모가 돈을 제일 많이 주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언뜻 두 분이 돈을 제일 잘 버신다고 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 어른 되어 보니 그것은 역시 사실이었다.) 그래선지 두 분이 가장 세련되고 멋지다고 느꼈다. 아이들은 다들 일찍부터 자본주의의 효과를 체감하고 있었다.


세뱃돈 전달식이 끝나고.. 아이들은 근처 양림단지와 춘향골? 에 가서 놀았다. 나는 받은 세뱃돈으로 화약총도 사고 이것저것 군것질도 사먹었다. 또래 친척 아이 한 명은 어머니에게 자기 세뱃돈을 보관 당해버렸다고(?) 울상이었다. 그 아이는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돈을 돌려줄거라고 그래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결국 되돌려 받진 못했다고 한다.


제기차기도 하고, 술래잡기 얼음 땡도 하고.. 화약총도 같이 쏘고, 군것질도 하고.. 오랜만에 본 친척 아이들과 너무 재밌게 놀았다. 하지만 어른들은 서둘러 가길 원하셨다. 이렇게 재밌는데 왜 어른들은 자꾸 집에만 가려고 하실까.. 아이 입장에선 참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은 같이 노는게 재미 없나?


갈 때와 다르게 올 때는 뻥뻥 뚫린 고속도로를 쏜살같이 내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빨리 달려 휴게소도 한 번인가 두 번 밖에 못들렸다. 나는 그게 참 아쉬웠다. 이상하게 돌아올 땐 우동도 안사주시더라.


설 연휴가 다가오면, 가끔 그 때가 생각난다. 남원 시골집에 두 번인가 더 찾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댁을 비롯해서 모든 친척분들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래서 그 시골집엔 다시는 갈 일이 없어졌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 집은 새 주인에게 넘어갔고.. 새 주인은 그 한옥집을 밀고 새 건물을 올렸다 했다.


지금은 아버지도 안계시고, 설이 되어도 그 때 만났던 그 친척들 누구와도 연락도 하지 않는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형제들끼리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이들도 시간이 흘러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기 시작하면서.. 만나도 서로 서먹서먹해졌다. 그렇게..서로 안만나게 되다보니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더라.


신기한 것은 아직도 내 머리 속엔 그 한옥집의 구석구석 모습들이 매우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거다. 지금도 그리라면 내부의 모든 구조를 하나하나 사진을 보고 그리듯 그릴 수 있을 정도다. 그 뿐 아니라 그 한옥집 내 부엌과 다락에서 나던 특유의 나무와 흙이 어우러진 듯한 냄새도 기억난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한 번도 지방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고향을 떠올리라하면 나는 그 때 갔던 그 한옥집 - 총 합쳐서 세 번이나 갔나 -이 떠오른다. 연락은 안하지만.. 다들 잘 지내고 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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