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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대로 Jul 11. 2023

걷기 여행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지에 가서도 유명 핫스팟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낯선 길거리를 걸으며 골목 구석구석 돌아보거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을 즐긴다. 내가 사는 곳과 다른 길거리 공간의 분위기와 냄새를 느끼며 새로운 감성에 빠져들기도 한다. 낯선 외부 자극을 온 몸으로 느껴보는 것도 좋지만, 실은 걷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도 크다. 걷다보면 평소에 생각 못했던 이런저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약 10만년 전, 아프리카에 모여 살던 원시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종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전세계 이 곳 저 곳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먹이가 떨어졌든, 기후가 악화되었든, 아니면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서든 인류는 끊임없이 이 곳 저 곳을 찾아 걸어다녔다. 인간의 머리 속엔 밝은 미래를 상상하도록 만드는 쾌감 중추가 있는데 뇌과학에선 이를 '도파민 보상회로' 라고 부른다. 학자들에 따르면, 도파민 보상회로를 만드는 유전자 중 더 많이 쾌락을 느끼고 미래에 대한 상상과 희망에 푹 빠져드는데서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현상과 관련있는 '7R' 대립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원시 인류는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 대륙, 중동과 중앙 아시아,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바로 이 경로에 따라 아프리카에서 멀어져 사는 사람들일수록 바로 이 '도파민 7R' 유전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더 많은 비율의 도파민 7R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탐험심과 호기심, 개척 정신이 더 높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어쩌면 수많은 나라의 이주민들로 구성된 아메리카 대륙의 미국이 오늘날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논리적 비약일수도 있으니 이 연구를 과대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많이 걷고 주변 환경을 탐험하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인간의 의지와, 쾌감을 일으키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도파민 보상회로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현대 사회로 오면서 사람들은 많이 걸을 필요가 없어졌다. 고정된 집과 학교, 직장만 오가도 살아가는데 아무 불편이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뇌는 보다 더 큰 즐거움을 얻기 위해 뇌를 자극할 꺼리들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뇌를 더 자극시키고, 더 자주 행복을 느끼기 위해선 우리의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더 자주 더 오래 걸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에게 걷기 위한 시간과 여유가 줄어드는 것과 스트레스에 대한 민감성이 증가하는 것, 자주 우울감을 느끼는 것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척추 전문가 정선근 재활의학과 교수의 말에 따르면, 걷기 운동은 줄기세포와 척추 디스크를 치유하는 인자들을 활성시켜 척추를 낫게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걷기 운동이 우리 몸의 건강에 다양한 방식으로 좋은 효과를 준다는 연구 결과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여기엔 걸음을 통해 다리 근육을 자극시킬 뿐 아니라 정맥 순환을 통해 몸 전체의 혈액 순환을 돕고, 발바닥 구석구석을 자극시켜 뇌에 좋은 자극을 주는 등등의 효과들이 있다.


민간 의학이나 대체의학에서도 오래전부터 발바닥 자극이 몸에 좋다는 상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의학에서는 발바닥 곳곳에 신체 장기와 연결된 혈점이 있어 이를 자극하면 해당 부위의 장기들이 깨어난다고 주장한다.


최근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뇌가 몸과 따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걷고 서고 뛰고 손으로 이런저런 도구를 다루는 등 몸을 움직이는 과정을 돕기 위해 진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곧 걷는 것 자체가 뇌에 좋은 자극을 주고 잠들어 있던 뇌의 기능을 깨울 수 있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보다 걸을 때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칸트는 평생 매일 일정한 구역을 걸었는데, 그가 걷지 않고 매일 책상에만 앉아 우두커니 생각만 했다면 그는 아마 세계적인 철학적 저서를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일본 여행에서 몇 날 몇 일 하루종일 걸으며 여행한 적이 있다. 걷게된 이유는 실은 대단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구글로 대중교통 버스를 검색하고 기다리는 과정이 귀찮아서다. 에라, 그냥 걸어가며 주변 경치도 보고 사람도 구경하면서 가는게 더 낫겠다, 하는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플 때도 있었지만, 그럴때는 잠시 쉬고 또 계속 걷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일만 하루종일 걸었더니 세상에, 뱃살이 쏙 들어가고 식욕이 돌고 머리 속이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피곤했던 것도 사라져서 점점 더 오랜 시간동안 걸어다녀도 멀쩡해졌을 뿐 아니라 밤에 잠도 잘와서 아침에 되면 상쾌했다.


걸으면서 하는 여행의 장점으로 골목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우리와 다른 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즐거움에 있다고들 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걷기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물론 여행을 가지 않고 우리 주변을 걸어다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매일 그러는 건 보통 의지가 아니면 쉽지 않다. 여행지에서는 눈에 들어오는 새로운 풍경들을 즐기는 것 자체가 꾸준히 오래 걸을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래서 여행 테마 중 '걷는 여행' 은 걷기 그 자체를 위한 꽤 괜찮은 여행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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