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갑순씨. 어제도 부장에게 쪼인 갑순씨는 오늘 매우 심난하다. 이 회사, 정말 그만둬야 하나. 고민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만한 조건의 다른 직장에 가도 똑같은 거 아닌가. 그냥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는게 나의 운명인가.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인스타와 페북을 켰다. 오잉. 부자집에 시집 간 친구 한명이 최근 유럽 여행에 가서 찍은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좋겠다. 나도 여행 가고 싶은데. 시간도 돈도 없으니 못가지.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갑순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순씨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갑순씨도 휴가를 내든, 회사를 때려치든, 가면 된다. 어라? 직장에서 돈벌어야 하는 입장이라 그런 생각 못한다고? 휴가가 짧아서라고? 유럽 여행을 가려면 휴가를 한 달은 있어야 한다고?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누구든 살면서 한 번은 유럽 여행을 한 달 이상 갈 수 있다. 인생 살면서 한 달도 시간을 못낸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본인 문제다. 혹시 그러면 매 년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가는 것을 꿈꾸는 건가? 그것은 욕심이다. 이 세상에 매 년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갈 수 있는 시간과 돈을 모두 구할 수 있는 직장은 - 적어도 한국에는 - 거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간도 돈도 충분한 경우다. 그러면 갑순씨는 틈만 나면 유럽 여행을 가게 될까? 한 두 번은 가겠지만, 여행작가나 여행유튜버와 같은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누구나 질릴 수밖에 없다. 여행이란 사진으로 보이는 것만큼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이동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 할 거 없이 보내는 시간이다. 누구나 일상의 대부분은 익숙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늘 함께 하는 가족, 자주 보는 친구, 매일 가는 직장, 자주 가는 식당과 카페 등. 낯선 곳에서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고 특별히 그 시간들을 대단한 것으로 채울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지금처럼 힘들게 직장을 다니며 부장에게 쪼이는 갑순씨와, 돈과 시간이 흘러 넘치는 갑순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다. 지금 현재 갑순씨가 유럽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상황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 그 상황이란 1) 갑순씨의 부자 친구가 유럽 여행을 떠난 것 2) 부장에게 쪼인 것 3) 직장이 힘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없었으면 갑순씨는 그다지 유럽 여행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갑순씨의 유럽 여행에 대한 욕망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타인과 상황이 만들어준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갑순씨는 돈과 시간이 흘러 넘치는 또다른 갑순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즉 갑순씨2의 욕망이 무엇인지 지금 현재로선 절대로 알 수 없다. 둘은 완전히 다른 '갑순' 이기 때문이다. 막상 언젠가 돈과 시간이 흘러 넘치게 되면, 갑순씨가 과연 그 때도 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을까? 위에 말했듯 한 번은 갈 수 있겠지만, 지금 갑순씨가 자기 친구를 부러워하며 유럽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만큼, 그 간절함을 유지하고 있을까? 아마 그 때 가선 또다른 욕망을 채우고 싶어 안달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다른 친구들과 만나 자기를 뽐내고 싶어한다는가, 자기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안달나게 된다든가 등등..
결국 위 상황에서 갑순씨가 원하는 것은 전부 타인이 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여기서 타인이란 1) 갑순씨의 친구 2) 돈과 시간이 많은 또다른 갑순씨 모두를 뜻한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과연 갑순씨가 본 갑순씨 친구는 정말로 유럽 여행을 원했을까? 정말로 유럽 여행을 그렇게 즐기고 있었을까? 사실은 막상 유럽 여행 갔더니 별로 할 것도 없고 지루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은데 시간은 많으니 갑순씨같은 친구 보라고 그럴듯한 사진들만 잔뜩 찍어 올린 것일 수도 있다. 이 때의 갑순씨 친구가 가진 욕망은 '남이 자신을 부러워하도록 만드는 것' 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갑순씨는 유럽 여행을 가고 싶은게 아니라, 그저 '부장에게 안쪼이고' '많이 힘들지 않은' 직장을 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기 어려워 괜히 인스타를 보며 자기 친구의 유럽 여행을 부러워한 것이다.
정리하면, 갑순씨가 진짜 원하는 욕망은 '워라밸 괜찮은 직장에 다니며 적당한 시간과 돈을 버는 것' 인데, 부자 친구 한명이 가진 '남들이 나를 부러워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에 휘둘려 '돈과 시간이 많은 또다른 갑순이가 되면 갈 수 있는 유럽 여행' 을 부러워하고 있는 셈이다. 갑순씨는 자신의 진짜 욕망이 뭔지도 모른채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 타인의 욕망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니 정확히는 타인이 실제로 욕망하지도 않지만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허상을 욕망하고 있다고 해야하나?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은 정말 어렵다. 대개는 배우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자기 욕망을 살펴볼 시간적 마음적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다들 뭔가에 쫓기며 살았고, 앞으로도 쫓길 일만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자기 욕망이 뭔지 살펴볼 여유가 생길리 만무하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쉽게 보이는 타인의 욕망 어딘가에 답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타인이 A 를 욕망하고 있으면, 나 역시 A를 갖게 되면 만족한 인생을 살 수 있겠지, 하고 어림 짐작 하는거다. 문제는 첫째, 나는 타인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 전혀 다른 욕망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둘째, 혹 나와 타인이 똑같은 사람일지라 해도 타인이 겉으로는 A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B를 욕망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껏해야 나의 욕망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타인의 실제 욕망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가, 그 일이 좋아서인지, 그 일로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유흥 업소 여자들과 놀고 싶어서인지, 그 일로 인정을 받아 승진한 후 아랫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며 쾌락을 느끼고 싶어서인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이는 자신의 가족, 연인, 배우자, 친구, 지인 등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나 부모조차도 서로의 진짜 욕망을 절대 알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를 계속해서 활성화시키기 위해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을 주입해야 한다. 기업들은 당신이 가진 그 희미한 자신만의 욕망은 진짜가 아니라고,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이 명품 백과 외제차, 최신 유행의 옷과 전자기기에 있다고 끊임없이 잠재 고객들을 유혹한다. 내가 이미 가진 모든 것들은 전부 유행이 지나버려 쓸모 없는 것이라고 속삭인다. 그런 것들을 갖고 있어서는 남들에게 절대 인정을 받을 수 없으며 곧 외로워질 거라고 말한다. 인스타와 페북 같은 SNS, 유튜브는 결국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무료로 광고해주는 거대한 광고 플랫폼에 불과하다.
자신의 욕망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과의 교류를 끊어보고, 소비를 줄여보고, 지루하고 고독한 자기 시간을 가져보는 것에 있다. 이 세 가지는 단 하나도 실천하기 어려울만큼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만큼, 자기 욕망을 찾기가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