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성론에서는 사회의 실재가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라고 파악한다. 어떤 지식이 참인 이유는 그 지식과 관련된 학파의 구성원들이 그것을 참이라고 합의했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이는 지식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가족, 기업, 친구, 정당 등 수많은 공동체는 사회가 그 공동체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합의를 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문제는 각 공동체에 대한 합의 내용이 사회 각 구성원들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회사를 다니지만 MZ세대는 그 회사를 그저 '돈 뽑는 기계' 정도로 생각하는 반면 중년의 임원들은 사회 속에서 자기가 몸담을 끈끈한 가족 공동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 대체 그 회사는 전자가 맞을까 후자가 맞을까? 엄밀히 말해 그 회사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따르자면 중년의 임원들에게 더 가까운 공동체일 수 있다. 여기서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중년의 임원들은 MZ세대가 회사에 충성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MZ세대는 중년의 임원들을 존재하지도 않는 가족 공동체에 헌신하는 바보들이라 여길 수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점점 공동체가 사라지는 변화를 겪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마다 현존하는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다양해지고 있다. 직장 뿐 아니라 가족, 학계, 각종 친목 모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다양한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런 공동체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냥 독립된 개개인이 매번 모일 때마다 잠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그 즉시 해체되는 인스턴트 모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모임에 자신이 기여하는 것과 모임으로부터 받는 것의 가치를 정교하게 계산해서 조금이라도 손해가 날 것 같으면 그 모임을 즉시 떠난다. 하지만 공동체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그 공동체에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인식이 다양해지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다. 동시에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역시 되돌리기 힘든 변화다. 문제는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이 변화를 인정하기 싫어하거나, 이 변화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람들은 그동안 독립적 개인으로 선다는 개념이 없었다. 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으로만 살아왔다. 그로 인해 공동체의 부당한 요구도 듣고 희생도 해야 했지만, 공동체로부터 얻는 이익도 충분히 많았기에 이를 상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화로 독립된 자아로 살아가는 것을 요구 받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고민과 스트레스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사회 곳곳에서 갑을 관계 문제가 터지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커지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 속에서 적응 못한 사람들이 받는 분노와 스트레스 때문으로 보인다.
점점 개인주의화되는 사회에서 독립된 개인으로 살아가는 가장 좋은 태도는, 일단 내가 속한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직장에 속해 있어도 나는 내일 당장 나갈 수 있고, 종교 모임이나 각종 사회 모임도 하루 아침에 관둘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상황에선 공동체를 비롯해 그 어떤 개인에게도 의존해선 안된다. 의존이라는 것 자체가 내가 의존하는 대상과 내가 공동체로 묶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한편으로 내 문제를 내가 다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나에게 가해지는 피해가 있으면 내가 알아서 피해야 하고,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욕을 먹더라도 나서서 그것을 쟁취해야 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살기 위해선 당연히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들의 비난이나 비웃음, 공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며, 나에게 지속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사람이 있으면 맞서 싸우거나 완전히 피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아직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에 맞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서이초 학부모 갑질로 인한 교사 자살 사건을 살펴 보자.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면 교사는 그 학생을 경질 시킬 권한이 있어야 한다. 학부모가 전화로 괴롭히면 그 학부모를 법적으로 격리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학생이 교실에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에도 교사는 모든 책임을 지지 않도록 규정이 만들어져야 한다. 만약 학부모가 학교에 와서 교사를 폭행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면 그 학부모를 폭행으로 바로 구속 시킬 수 있는 법적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이런 규정이나 법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아직 우리 사회가 공동체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교 구성원이기 이전에 독립된 개인으로서 보호 받아야 하는데, 그저 학교의 수많은 구성원 중 1개 요소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거다. 이를 잘 파악한 학부모들은 교사를 꼼짝못하게 할 여러 틈새 무기들을 활용할 수 있다.
학교 뿐 아니라 수많은 사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직장은 직장에 헌신하는 공동체주의적인 사람들을 착취한다. 오히려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적당히 일하고 그에 맞는 보상을 적당히 받으며, 손해가 날 경우 직장을 옮긴다. 이 둘은 직장 안에서 서로를 불편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직장 입장에선 아직까진 공동체주의적 문화가 유지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여기에 관해 근로자 편을 들기 보단 직장 편을 들 수밖에 없어 관련 법과 제도 정비를 망설이게 된다.
한국 사회의 탈공동체화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 하다. 우리식 개인주의 사회에 맞는 법과 제도가 정비되기까지는 앞으로도 꽤 많은 사건 사고가 필요하고, 시간과 비용도 많이 소요된다. 개인으로서는 그 때까지 어떤 스탠스로 사회 생활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시대 흐름상 다시 공동체주의 사회로 돌아가긴 어렵다. 공동체주의 사회는 구성원들의 소득과 재산 수준이 낮은 상태로 균질화가 이루어지고, 각 개인의 인생이 단조로워야 하며, 인종적 구성도 비슷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점 개인주의화로 진행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변화라고 인정해야 한다.
법과 제도가 완전히 정비되기 전까진, 그래서 늘 의식적으로 당당하게, 자기 권리와 이익을 철저히 챙기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우월 전략이다. 지금 사회에 남아 있는 영속적일 것처럼 보이는 공동체와 그 안의 자리들은, 5년 후, 10년 후가 되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런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행동이다.
다만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약한 정도의 공동체가 더 촘촘히 발달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인간은 애초에 홀로 살 수 없고,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살아갈 때 안정감과 행복을 느끼는 존재다. 공동체가 파괴된 후 그에 대한 대체 공동체가 없어 고립된 개인들이 늘어나는 사회 중 하나가 일본인데, 일본 역시 고립되어가는 개인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많이 겪고 있다. 히키코모리 문제, 고독사 문제, 고독한 사람들에 의한 각종 범죄 등..애초에 공동체주의적인 문화에 익숙해있던 한국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상실은 대단히 큰 정신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