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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

by rext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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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높은 자살율, 정치나 세대, 성별 등 여러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과 같이 다양한 사회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지금의 한국은 과거 일본이 겪었던 정체성의 위기 비슷한 것을 겪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 한국 사람들은 여러 삶의 의무를 지고 살았다. 늦지 않게 결혼할 것, 아이를 잘 키워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직업을 갖게 할 것, 가문의 존속을 위한 의무들을 다 할 것 등. 이런 여러 의무들은 물론 개인을 억압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한 개인이 별다른 고민이나 공허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게 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나이 차기 전에 결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20대와 30대 초까지 다른 모든 고민을 접고 오로지 좋은 짝 만나 결혼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만들었고, 전국민이 전부 그러니 그렇게 과제처럼 사람을 찾는 자신의 행동에 특별히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아이가 생기면 또 그 아이를 잘 키우는데 온 신경을 다 썼고, 그 과정에서 가족과 친척들의 대소사를 전부 관리하고 친구들, 고향/학교/직장 선후배 동기들과의 인맥 관리를 하는데만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쓰게 되었다.


그러다보면 또 아이는 훌쩍 커서 대학생 / 취업을 준비하고 그 후 또 결혼하고 손주를 보게 되니 죽는 날까지 해야 할 과제(?) 를 해내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꽉 채워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인생이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나 그간의 인류사의 관점에서 봐도 그 자체로 매우 의미 있는 삶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럴 필요가 없어지게 되니.. 겉으로 보기엔 의무감에서 모두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결국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과거엔 부유한 철학자, 귀족들이나 했을 고민을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든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하는 존재라 결국 그 빈자리를 '뭔가 완벽한 삶' 에 대한 이상향으로 채우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적당한 것으로는 이 허전함을 채울 수 없으니 완벽한 무엇인가에 매달리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완벽한 짝, 완벽한 배우자가 아니면 결혼은 의미 없다, 아이를 완벽하게 키울 수 없으면 출산할 필요가 없다, 완벽하게 내 맘에 맞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일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잦은 해외 여행과 호화로운 삶이 내 삶을 더 완벽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알고보면 완벽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목표와 의미를 잃은 허전함이 보통의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아서 생긴 집착 같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뇌의 보상 구조가 있다고 보는데, 다시 말해 직업과 일 - 결혼 - 출산 - 양육 - 다시 그 아이의 직업과 일 - 결혼... 이같은 틀에 조상때부터 오랫동안 맞춰온 삶의 틀에 맞춰 살 때의 안정감이나 성취감, 소속감 같은 것을 대신할 만큼 강한 뇌의 보상을 느끼지 못하게 된 탓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사는 것이 답이다' 라는 말을 개개인에게 적용시킬 땐 매우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면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고 사는 삶이 디폴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기에 개개인의 타고난 성향까지 더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예를 들어 성공한 누군가의 삶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저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 행복하겠구나, 하는 것은 대단히 큰 착각일 수 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실제 행복한지 아니면 끝없이 고통에 시달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특히 마약하는 연예인들 보면), 그 사람이 과연 그 선택을 했기 때문에 행복한 건지 아니면 무엇을 선택하든 타고난 유전적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지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데 좋아 보인다 - 좋아하는 무슨 일을 찾아 하니 행복하대더라, 여행을 자주 가니 행복하대더라, 무엇을 하며 사니 행복하대더라... 그런 말은 전혀 검증 안된 말에 불과하고, 혹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런 것이 나에게 적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쭉 - 삶에 대한 고민과 의문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 보는데 그 이유는 그 누구도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다 얻지는 못하는 것, 세상 살면서 내가 원하는 것만 하며 살 수는 없다는 것, 출산과 양육이라는 생물학적인 본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내가 나 자신을 알기도 전에 인생이 저만치 흘러가 버리고 선택항목이 줄어드는 현실 등


누군가 '살아보니 인생은 이렇더라' '세상은 이렇더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한다면, 그게 정말 진심으로 그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지 아니면 본인도 그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남에게 그런 말을 강요함으로써 자기 삶을 합리화 시키는 건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그게 맞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게 전혀 아닐 수 있고.


나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기 삶을 긍정하게 된다.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겠지만, 실은 오랫동안 자기가 자신을 지켜보며 '아 이 친구는 이런 한계가 있어서 어차피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겠구나' 하는 깨달음 아닌 깨달음? 이 더 클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답 없이 하루 하루 앞 날을 전혀 예측 못한 채 리스크를 걸며 살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인생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는 사람들은, 평행우주가 있어 다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완전히 달라졌을 수없이 많은 인생의 선택지 중 단 한 가지의 예측 가능한 삶을 살았던 것 뿐이다. 어쩌면 예상을 벗어난 다른 삶을 선택한 또 다른 나의 드라마틱한 삶을 보며 아차 싶을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선택으로 말도 못하게 망가지는 삶을 보며 그래도 지금의 나 정도면 다행이군, 하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 평행우주의 다른 내 인생을 보며 그런 감회에 젖어든 순간에도 나의 인생은 계속되고 있고, 오늘까지의 인생이 내일 할 다른 선택 때문에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숙제로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세상 아무리 더 좋은 선택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의 인생이 나에게 해답 근처도 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 바로 옆 사람이나 가족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식과 부모 사이도 마찬가지인데, 둘은 유전자도 반만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면, 실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적당히 맞춰서 결혼 출산을 하든, 완벽한 짝을 찾든, 완벽히 좋아하는 일, 소속감을 느낄 완벽한 공동체를 찾는 것 등등 - 그 중 어떤 것이 맞을지 알려면 - 그 누구에게도 무엇이 답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 누구의 삶도 참조하지 않고 홀로 고독한 결정을 할 수 있는가, 그 결정에 스스로 확신이 있는가가 아닐까. 어떤 사람에게 물어서 확신을 얻든, 물어본 그 사람은 언젠가 자기 인생에서 사라지고 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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