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에 기억
이 신발은 구입한 지 딱 10년이 됐다.
이제 집에 있는 여러 물건들은 저마다 시간의 세례를 받아 내 손이 닿으면 그간의 히스토리를 한 번씩 들려주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 같다.
오래전에 자주 갔던 한남동 조개구이집에서 얼큰하게 술 한잔하고 나왔는데 그때 같이 있던 친구는 택시 타고 집에 갔고 난 집에 걸어갈 거라며 걷기 시작했다.
한강을 건너야 우리 집이 나오니 당연히 한강공원으로 걸었다.
걷기 시작한 지 한 30분 정도 됐나,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해산물들을 많이 먹어 그런가 생각하면서 걸었는데 바로 앞에 화장실이 보였다.
배가 아주 살살 아팠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또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는데 이건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이 느껴졌다.
이 정도 걸었으면 화장실이 나올 텐데, 이미 지나쳐온 화장실에 가기에는 또 그만큼 시간이 걸리겠다 싶어 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화장실 표시를 봤고 조금만 더 가면 화장실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더욱더 빨리 걸었다.
지금은 라이딩하는 사람들, 러닝 하는 사람들이 많아 따뜻할 땐 한강에 사람들이 참 많은데 그때는 거의 사람이 없었고 마치 밤에 시골길을 걷는 그런 기분이었다.
아마도 너무 늦은 밤이라 더 그랬었을 것이다.
드디어 화장실이 나타나서 봤는데 불이 켜져있지 않았다.
설마 하고 들어갔는데 전원이 다 나간 건지 스위치를 만져봐도 전혀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다행히 세면대에는 가로등 빛이 조금 들이쳐서 내 손은 보였다.
그런데, 일을 보려면 변기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서 문을 닫으니 완전 암흑이었다.
그래도 별 수 없으니 이용을 할 수밖에 없었다.
휴지가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휴지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참 일을 보고 있는데 누가 밖에서 화장실에 발길질을 하는지 쿵! 쿵! 쿵! 거렸다.
화장실 자체가 컨테이너 같이 생겼고 철제니까 어느 한 곳만 쳐도 전체가 울렸다.
난 아직 마무리를 다 못했는데 다급하게 정리하려고 하자 화장실에 발길질을 하던 그 사람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들어가 있는 곳 문을 손과 발로 치기 시작했다.
아직 바지도 안 올렸는데 불도 안 켜지는 그런 곳에서 누가 문을 부숴버릴 듯이 그렇게 쳐대니 공포영화에서 쫓기는 그런 신세가 된 것 같았다.
"야! 너 누구야! 그만 안 해!"
소리를 질렀는데 대답은 안 하고 또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 씨, 나가면 죽을 줄 알아!"
문이 밖으로 열리는 거였으면 확 열어버리고 싶었는데 안으로 열리게 되어 있어 벽에 한껏 붙어선 다음에 문을 확 열었다.
가로등 불빛과 달빛에 섞여 실루엣만 보였는데 아주 많이 취한 아저씨였다.
"뭐야. 이 새끼야!"
소리를 질렀는데 반응이 없었다.
겨우 서있는 상태였고 아무 말도 없고 그대로 서있기만 하더니 갑자기 풀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난 극심한 공포상태였는데 눈앞에 주저앉은 사람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아저씨, 아저씨, 괜찮아요? 일어나 보세요"
나도 술을 마셨는데 술냄새가 많이 느껴질 정도니 이 사람은 마치 술로 세수를 한 것처럼 술냄새가 진하게 났다.
"아저씨, 정신 차려봐요. 집에 가야지, 여기서 잘 거야? 얼른 일어나 봐요"
아저씨를 밖으로 끌고 나와 바닥에 놔두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나왔다.
나와보니 고개는 조금 늘어뜨리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앉아있었다.
"아저씨, 왜 나 똥 싸는데 들어와서 난리야. 나 똥 싸는 거 마음에 안 들어? 응?"
대꾸가 없을 줄 알았는데 괜히 얘기해봤다.
어떤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한껏 꼬여서 화장실을 그렇게 발로 차고 그 난리를 부렸을까.
나를 만난 게 다행이었을까.
그나마 여자 화장실이 아니고 남자 화장실이었던 것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 참았던 수고로움과 짧은 시간 겪었던 공포로 나도 힘이 좀 빠져서 한 오 분 정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눈을 끔뻑거리기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를 해놓을까 하다가 말을 한번 더 걸어봤다.
"아저씨 집에 갈 수 있어?"
늦여름, 초가을이어서 날씨는 괜찮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 한강공원 출입구가 있어 조금만 가면 택시도 탈 수 있었다.
집에 갈 수 있냐는 말에 그 아저씨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럼, 알아서 잘 들어가. 난 갈 테니까. 다른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다음부터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이 자식아"
뒤통수를 갈겨주고 싶었지만 참고 집까지 다시 걸었다.
다리를 건너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살까 하다 그냥 생수 한 병을 사서 벌컥벌컥 마셨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세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오래 걸었는데 발이 하나도 안 아팠다.
그 아저씨는 대체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서 다시는 술 마시고 집에 걸어걸 거라는 계획 같은 건 절대 세우지 말아야지 하며 잠이 들었다.
이 신발과는 이런 추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