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모자 Sep 19. 2024

축구라는 늪

남자이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몸에 열이 많아 여름에 조금만 뛰어도 탈진하곤 한다. 잘 안 뛰다 보니 체력이 저질이다. 15분, 20분 넘게 뛴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한다. 게다가 운동신경도 없어서 공을 찬다는 행동에 대한 감이 상당히 부족하다. 어떻게 차야 앞으로 붕 떠서 공이 날아갈지, 어떻게 하면 휘면서 공이 날아갈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같이 뛰는 사람들에게 구박받기 딱 좋다. 그래서 난 구기종목이면서 단체로 경기하는 특히 축구 같은 운동을 싫어한다.


남자라면 학교부터 군대 등 다양한 단체생활에서 지긋지긋하게 축구에 엮이게 된다. 체육시간, 운동회 등에서 축구경기를 뛰기 싫어도 뛰어야만 하는 상황들이 자주 생긴다. 수업이면 수업, 행사면 행사, 축구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면 못하는 애들까지도 억지로 끼어넣는다. 목소리 좀 큰 애들이 뛰라고 겁을 주기도 했고, 거절할 수 없게 설득하기도 했었다. 공을 찰 줄 몰랐으니까 발로 차다가 혼자 넘어지기도 했고, 엉거주춤하게 개구리 자세로 수비를 하니까 잘하는 친구에게 쉽게 패싱 당하기도 했다.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화받이가 되더라도 단체생활이었으니까 참고 뛰어야 했다. 그런 불쾌한 감정이 쌓이다 보니까 축구를 더 거부하게 된 것 같다.


시간이 흘러서 학교에서 군대를 지나 직장에 다니는 나이가 되었고, 여전히 나는 축구라는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야만 한다. 입사 당일 날 축구동아리에 가입하지 않겠냐는 선배의 권유를 거절했다가 몇 달 동안 그 선배가 인사를 안 받아주는 일도 있었다. 전국에 있는 다른 유사 기관들과 연합해서 추진하는 축구대회는 야속하게도 매년 한 번씩 열렸고, 회사 운동회에서는 시작 전에 축구 경기를 꼭 진행했었다. 그럴 때마다 참여하기 싫어서 이 바쁘다, 외부 손님이 온다 등 갖은 핑계로 요리조리 변명하거나 피해 다녔다. 평소에는 축구의 축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축구하지 않겠냐고 권유하는 선배, 동기들에게 축구를 잘 못해서 안 뛴다,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등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거절을 반복했다. 아무 생각 없이 동아리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대타로라도 뛰게 될까 봐, 한 두 번 뛰었다가 공 찰 줄 아는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평가에 등 떠밀려 참여하게 될까 봐 아예 필드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어렸을 때 축구를 못한다는 이유로 망신당했던 기억이 축구를 접할 때마다 생각난다. 내가 실수할 때마다 소리 지르며 화내고 비웃었던 기억들은 축구를 기피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격한 운동을 할 때 나오는 남자들의 과격한 성격이 그때부터 꽤 불쾌하게 느껴지게 된 것 같다. 자존심이 조금 강하기도 하고, 못해서 무시당하는 것을 견디질 못하는 성격도 한몫한 것 같기도 하고. 축구를 거절할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느낌이 있다. 남자들 무리에 끼지 못하고 배제되는 것 같다는 소외감. 그 때문에 단체 내 약자가 되고 사람들과 못 어울리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 같은 소수자 감성. 느껴질 때마다 뭔가 가슴이 아리지만, 그래도 축구를 뛰어서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나아서 늘 도망 다닌다.


단체생활이라는 명목으로 축구에 강제로 참여시키는 문화는 조금씩 없어지고 있는듯 하지만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체육대회 할 때마다 축구 참여 안 하는 직원들은 다른 종목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책임론을 제기하는 직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축구경기에 참여하는 것을 권위를 얻는 어떤 행위라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아직 많은 것을 보면 그렇다. 다만, 최근에 회사 축구동아리에 사람이 너무 부족해서 문제라는 얘기가 가끔씩 들려오는 것을 보면, 조직생활을 잘하기 위해 축구를 뛰어야한다는 관념이 옅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개인생활이 중요해지는 사회 분위기에 안 맞게 퇴근시간 이후 또는 주말에 다같이 모여서, 그것도 매주 축구를 뛰려고 하니, 당연히 참여가 저조해질 수밖에. 다른 직원들과 친해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겠지만, 뭐 이렇다 하더라도 어차피 마음맞는 직원들끼리는 어떻게든 친해지니까 앞으로도 회사가 굴러가는 데에는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이전 02화 너는 내 지인이고, 나는 사장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