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긴 인생. 내가 지향해 온 라이프스타일이다. 출세니 권력이니 하는 남들이 탐내는 파워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누군가와 부딪히면서 기싸움하는 모양새의 모든 활동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행사해서 어떤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것. 그럼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류의 영웅담은 내 기질에는 맞지 않는다. 영웅담을 실현하기 전에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난 조용히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인 공공 영역에서 돈을 벌기로 결정했었다.
일개 부서의 부서장이든, 회사의 사장이든 어떠한 집단의 리더는 집단이 가야 하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수시로 의사결정을 하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지는 역할을 담당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그런 리더십을 가지고 리더의 자리에 앉아 일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요즘 사회에는 본받을 멘토는 없고 꼰대들만 가득하다는 많은 젊은이들의 한탄이 리더에도 적용이 된다. 명확한 지시, 의사결정에 대한 책임, 그와 더불어 소통능력, 부하직원 보호 등 리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자격미달이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서장한테서도 그런 모습을 보았다. 현업부서에서 맡아서 해야 하는 업무인데도 못하겠다는 말 한마디에 덥석 물고 온 걸 보고 어이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동석한 자리에서 결정된 것도 아니고, 본인이 그 부서장과 얘기해서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나한테 통보했었다. 금액이 큰 구매 건인데, 민원소지가 다분한 수의계약 방식으로 계약상대자를 결정하겠다는 방침을 우리 부서 고유업무도 아닌데 나보고 기안하라니. 솔직히 성과는 본인이 챙기고, 책임과 민원은 나보고 다 감당하라는 식으로 느껴졌다. 민원인들은 실무자에게 전화하고, 감사를 받을 때는 실무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그렇다고 업무지시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계약업무에 대해 부서장이 잘 알지 못하니, 수의계약이니 어떤 업체들을 고려하니 등 큰 틀에서만 지시할 뿐이었고, 세부적인 방안은 내가 고민해야 했다. 몇몇 세부업무는 실제 사업을 추진할 현업부서에 던져버리고 싶어서 회의 때 여러 번 언급을 했지만, 부서장은 현업에 업무를 던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현업부서에서 내가 진행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냐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서 나보고 다 하라고 말할 때 그냥 멀뚱멀뚱 가만히 있을 뿐, 변호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다 하길 원했던 것 같다. 골치 아픈 이번 건 하나 잘 해내서 진급하기 전에 점수를 따겠다는 셈이 있었을 것이다.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기회가 머지않았으니까.
회사에서 내가 거쳤던 부서장들을 보고 안타까웠던 경우가 많았다. 위에서 시키는 일이지만 위험성이 높은 업무지시면 반론이든 설득이든 해서 본인 포함 실무자들이 다치지 않게 해야 하지만, 본인이 싫은 소리 듣기 싫다는 마음에 사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어떻게든 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면 같이 일하는 직원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그 업무지시가 위법적인 일이거나, 강한 민원 또는 감사지적이 예상되는 일이면 급격히 불안해진다.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나. 여러 사람 다칠만한 일인데 알고 덥석 물은 건가 의구심이 들고, 이는 불안감으로 확산된다. 리더는 책임지는 자리라는 것에 많은 이들이 생각만 하지, 실제 사법처리든 내외부 감사든 결과를 보면 실무자에게 책임을 강하게 무는 경우가 많다. 시킨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 잘 듣는 부하직원이 대신 뒤집어쓰는 형국이 요즘 사회이다. 그래서 괜히 나에게 불똥이 튀진 않을까 일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겁이 난다. 문제가 생겨봤자 앞길이 창창한 젊은 실무자만 다치니까. 공기관은 사람을 정리하지 못하니까 이미 올라갈 데로 올라간 간부들은 다칠 일이 별로 없다.
아무리 성과창출에 갈증이 있어도, 같이 일하는 부하직원 챙기는 건 리더로서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하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회의석상에서 타 부서가 본인들 업무를 다 우리한테 떠넘기는데 힘없는 실무자가 겨우 항변하는 걸 옆에서 방관만 하고 있는 리더라니. 외부 업체가 민원 제기할 게 뻔하고, 나중에 감사지적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데도 자기가 직접 하는 일이 아니니까 실무자가 일이 많든, 책임을 지든 말든, 본인은 성과만 챙기면 된다는 태도로 일관하면 같이 일하는 부하직원 입장에선 사기가 확 떨어지고, 퇴사욕구가 샘솟게 된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방향성을 잃게 되니까. 회사생활에 소위 현타가 와서 관두는 직원들 중에 비슷한 경우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2024년이 됐지만, 리더십은 아직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지속가능한 회사가 되려면 진정한 리더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