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근무시간에 일만 하는 편이다. 주위 동료들과 잡담은 웬만하면 하지 않고, 일과 관련된 말만 할 뿐이다. 업무량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늘 마음의 여유가 없다. 누군가와 딴짓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업무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완벽주의가 마음을 초조하게 만든다. 항상 업무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일하고, 업무처리 방법에 관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민원이 제기되면 안 된다는 생각, 감사 때 지적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뇌를 빙글빙글 돈다.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보신주의가 딴생각하기를 가로막는 것이다.
사실 우리 회사가 그렇게 큰 회사도 아니고, 내 업무가 회사 내에서 중요한 업무라고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위중한 업무인 것도 아니다. 멘탈이 강하다면 누가 지적을 하든, 상사가 혼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성깔에 맞게 회사를 다니면 된다. 국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우리 회사는 객관적으로, 전체 경제의 어느 한 작은 부분을 담당하는 소박한 기관일 뿐이다. 작고 소중한 연봉에 만족하며, 같이 일하는 상사, 동료가 맘에 안 들더라도 무시하며, 하루하루 내 인생을 갈고닦고 내 마음대로 꾸민다는 마음으로 다니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고 나 혼자 되새겨도, 회사를 다니는 내 마음은 늘 헛헛하다. 평일에 집에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데, '오늘 하루 그래도 뿌듯하다'라는 마음 하나 없이 회사를 다닌다는 게 무언가 서글프다. 일할 때는 긴장되고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근무시간이 끝나면 개운한 마음과 약간의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퇴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뭔가 모자라고, 불안한 마음은 나의 퇴근길을 찝찝하게 만들곤 한다. 허전한 느낌인 걸 보면 어떠한 결핍인데, 어떤 종류인지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러다 외부기관에 제출할 자료를 만든다고 나 혼자 매일 밤 야근할 때 나와 같은 업무를 하는 선배에게 실망하며 그 결핍이 어떠한 것에 대한 결핍인지 느꼈다.
연초에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일주일 정도 갔었다. 숙소는 도쿄 외곽의 어느 주택가에 있었고, 여느 단독주택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숙소에서 15~20분 정도 주변을 걸었던 것 같다. 주택 사이에 웬 조용한 신사(神社)가 하나 있었다. 방문하는 사람이 없어 정말 조용한 곳이어서 바람소리와 풍경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빨간색 조명이 오묘하고 영롱하게 제단을 비추고 있었는데 제단 앞으로 가니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신비롭게 느껴졌다. 마치 소원을 빌면 뭐든지 이뤄질 것만 같았다. 손님으로 와서 아무것도 안 하기 뭣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동전을 다 털어 넣으며 기도를 드렸다. 내 기도는 단순했다. 당시에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뭐든 상관없으니 올해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한 해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오고 2달 만에 인사이동으로 부서와 업무를 옮기게 되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2명의 새로운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지금까지도 새롭게 추진하는 업무들이 주기적으로 생기고 있다. 다른 기관들이 해본 적 없는 시범사업을 추진하기도 했고, 창사 이래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업무를 추진해 봤고, 현재진행 중인 건도 있다. 업무를 배우기도 힘든데 남들이 해본 적 없는 업무들도 같이 하려니 혼란스러움을 넘어 이제는 번아웃이 와서 버겁기까지 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사실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닌데.
그때마다 내가 필요로 했던 건, 믿고 따를 만한 멘토였다. 예전에 다녔던 금융기관에서 만났던 그 차장님과 같은 멘토를 늘 만나고 싶었다. 본인 업무에 전문성을 가진 건 기본이고,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다정하게 챙기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업무지시를 요청하면 친절하게 알려주고, 안심시키고, 본인이 해야 할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구분했다. 게다가 적당히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융통성이 충분한 사람이었고, 마음에 늘 여유가 있었고, 같이 일하다 보면 나도 덩달아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챙길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곳에 산다며 먼 외지에서 출퇴근하는 후배직원들이 먼저 퇴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운전이 미숙해서 버거워하는 것 같으면 본인이 운전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술강요는 물론 없었고, 술을 못 먹는 직원이 술자리를 부담스러워하면 자리를 흔쾌히 바꿔주기도 했다. 인턴 신분이었던 어린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저런 선배가 되겠다는 다짐을 홀로 하기도 했었다. 같이 일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선뜻 생기는 그런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 회사에 오니 그런 선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기 일에 치여서 동료를 챙길 여력이 없는 '지 코가 석자' 선배와 어떻게든 일을 시켜 이용해 먹고 본인은 일에서 손을 떼려는 '지밖에 모르는' 선배만 있을 뿐이다. 업무적으로 입사 후부터 직급에 안 맞게 어려운 업무만 줄곧 맡아왔었던 나에겐 아마도 멘토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새로움에는 불안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업무시간 내내 불안감을 인내하며 지내왔었던 기억이 난다. 그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는 사람이 멘토인데, 업무에 관해 편하게 물어볼 선배도 없고, 인간적으로 편하게 교류하며 마음의 안정을 나눌 선배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시절을 1년, 2년 넘기며 계속 참으며 지내다 보니 습관이 되고, 적응이 되었다.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나에게 평범한 삶이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욱 쉽게 지치고, 의욕도 덜 생기고, 그러다가 결국 불편한 마음으로 찾지도 못할 행복을 찾아 이직하게 되는 건 아닐까 겁이 나곤 한다.
다른 부서와 일을 하다 보면서 요즘 느끼는 게, 저연차 직원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서 아는 게 없다는 점이다. 본인 사수에게 물어봐야 할 내용을 다른 부서 선배한테 물어보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되고, 이것도 모르고 일을 한다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업무교육이 부실한 경우들도 많다. 전부, 같이 일하는 선배가 후배에게 업무에 대해 충분히 가르쳐주지 않아서 생기는 불상사라고 생각한다. 계속 업무를 배우며 매일매일 새로움을 이겨냈던 나와 일부 비슷한 처지이지 않을까 싶다. 그들도 멘토가 필요할 것이다. 아니, 아마도 모든 직원이 멘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멘토가 되어줘야 한다. 적어도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사이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