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무라면 Oct 09. 2018

어느 삼십세

유부남이 된 서른살 퇴사자의 고백(파이 이야기)


그리고 여기, 한 시인은 이렇게 읊조린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라고.


그랬다.
본래 서른은 그런 시기임이 분명하다.
혼돈 한 가운데서 방황하는.
그게 자연스러운 삶의 섭리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삶의 운명 안에서
굴러다니는 애처로운 한명의 인간일 뿐이다.

 






                  [시] 삼십세

  

                                          - 최승자 시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릎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릎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노래] 서른 즈음에


                                 - 김광석 노래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단편소설] 삼십세


                                                   - 잉게보르크 바흐만

                                (오스트리아 여류 시인·소설가)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에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곧 잊어버리게 될 어느 날 아침,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는다. 잔인한 햇빛을 받으며, 새로운 날을 위한 무기와 용기를 몽땅 빼앗긴 채. 자신을 가다듬으려고 눈을 감으면, 살아온 모든 순간과 함께, 그는 다시금 가라앉아 허탈의 경지로 떠내려간다. 그는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고함을 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고함 역시 빼앗긴 것이다. 일체를 그는 빼앗긴 것이다!). 그러고는 바닥 없는 심연으로 굴러 떨어진다. 마침내 그의 감각은 사라지고 그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해체되고 소멸되어 무(無)로 환원해 버린다.


                                                   - 소설 도입부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여라.”


                             - 애니메이션 「환상마전 최유기」,

                                           현장 삼장의 대사 中에서



   공자는 삼십세를 ‘이립(而立)’이라 일컬었다.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학생 시절, 도덕 시간에 언뜻 배웠던 것 같다. 그 당시, 도덕선생님의 말씀을 흘려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서른 살쯤 되면 견고하게 내 자신을 다잡겠지.


   시간이 흘러 서른 살이 된 나는 공자를 죽이기로 했다. 혼탁한 정신적 방황이 점점 심해지는 서른 살에게 이립(而立)이라니.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선다 라…. 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않아 이다지도 혼란스럽단 말인가. 누가 그를 4대 성인이라 칭송했는가.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다. 본인은 똑똑하고 훌륭해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나. 삐뚤어진 충동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혼란의 삼십세를 겪는 것은 비단 나뿐 만은 아닌 것 같다. 주변 지인들만 봐도 누구 하나 온전히 안정적인 삶을 사는 이는 없다. 영원히 청춘의 모습으로 우리네 마음에 박제된 한 음악가는 서른 즈음의 시절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또 이역 땅의 한 소설가는 자전적 소설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바닥없는 심연으로 굴러 떨어진다. 마침내 그의 감각은 사라지고 그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해체되고 소멸되어 무(無)로 환원해 버린다.


   그리고 여기, 한 시인은 이렇게 읊조린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라고. 그랬다. 본래 서른은 그런 시기임이 분명하다. 혼돈 한 가운데서 방황하는. 그게 자연스러운 삶의 섭리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삶의 운명 안에서 굴러다니는 애처로운 한명의 인간일 뿐이다.


   서른 살. 나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나왔다. 뚜렷한 사회 경력도, 특별한 전문 지식도, 모아둔 돈도 없었다. 심지어 덜컥 한 가정의 남편이 되어버렸다. 서로 삶을 나눠야만 한다는 처(妻)가 있었지만, 무능하고 나약한 남편이 되기는 싫었다. 그럼에도 도망치듯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무의미하게 삶을 연명할 수도, 그렇다고 생을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삼십세'란 시를 알지 못했으나, 그랬던 것 같다. 추상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의 파편들을 한 시인이 적확한 언어로, 그리고 문학으로 표현했다. 시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권투 선수의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사각의 링과 같은 인생에서 나는 흰 손수건을 던져버렸다. 실컷 후드려 맞아 이미 실신해버린 나는 흰자위조차 뜰 가느다란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처참하고 무력한 항복이었다.





   지난 4개월간의 백수 한량 생활.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 단언한다. 비굴하게 노동을 팔지 않아도 삶을 연명할 정도의 용돈이 꼬박꼬박 들어왔고, 여백의 시간은 그 자체로 안식이었다. 가사 일을 하며 누군가의 고됨을 헤아려도 보게 되었고, 폭넓고 깊은 독서에 빠졌으며, 사회와 개인에 대해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지금까지의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도 담긴 (뻘)글을 쓴다.


라고 정신승리를 해본다. 나름 성실히, 열심히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보상이라 위안을 해본다. 아니,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믿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서른 살이란 그런 시기니까. 시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공자를 죽이겠다 라 했던 나의 선언이 얼마나 오만하고 얄팍한 감정에 기인했는지 깨닫는다. 위대한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성인이라는 공자 역시 삼십세를 겪었다. 그 역시 인간적인 혼란을 겪었을 것이고, 그 역시 스스로의 삶에서 정신승리를 했다.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멋진 말로 포장하여. 서른 살이란 그래야만 하는 시절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 시절이니까.


   어느 작가는 「파이 이야기」를 읽고, 오랜만에 훌륭한 소설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아온 생은 너무 ‘날 것’이라, 때로는 가공이 필요하다. 유치하고, 황당하고,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의 가공이 필요하다. 가끔은, 그래야 자신의 생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한 소년이 구조받기 전까지 자신이 한 행동을 용서 받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을 구원받기 위해, 신 앞에서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을 납득할 만한 이야기로 바꾸어가는 과정이다.


   삼십세는 결국 삶을 돌아보고, 처절하게 ‘날 것’ 이었던 본인의 인생을 가공할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기 위해서, 나아가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그래야만 남은 삶의 여정을 살아낼 수 있으니까.


   그렇게,

   길 잃은 서른이란 언덕 위에서

   마음 속 한 겹의 철판을 더 깔아본다.









* 소설 「파이 이야기」(원제 : Life of Pi)
   영화화 되어, 우리나라에서는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 1월 1일에 개봉되었다.

** 본 글에 삽입된 바다 위 나룻배 사진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스틸사진이다.

*** 시, 노래, 소설, 영화, 그리고 만화까지 한 글에

     엮어보고자 했던 필자의 노력이 참 가상하다

    (라고 스스로 가공한다).

**** 어느 작가는 최민석 소설가이고
        채널예스에 연재된

       「최민석의 절도(竊圖)일기」 란 코너의

        한 에세이에서 발췌했다.

**** 아내가 이제 삼십의 문턱을 넘으려던 그 시점,

         그녀는 김광석의 「 서른 즈음에」
         듣지 않았다.

         대체 왜 안 듣는지 당시에는 정말 궁금했다.

         이제는 알겠다.

         그건 그녀만의 정신승리법이었던 것이다!

***** 이 넓은 우주의 모든 89년생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혹은 방황을 겪고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친다).


아, 우린 아직 (만으로) 스물여덟 혹은 스물아홉 살이라고?


나는 그런 무책임하고 허망하고 맹목적이며 맹랑한

정신승리를 하는 당신을 응원한다

(그대의 나이가 어떻게 되던, 사실 그건 중요치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Can I Özil You?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