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박완서) 산문집 리뷰
풍성하게 쌓인 낙엽을 밟는 맛은 보는 맛 못지않았으며, 젖은 낙엽이 풍기는 냄새는 특이했다. 꽃내음처럼 야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늙어서 풍기는 체취처럼 염세적이지도 않은, 코끝과 정감을 동시에 건드리는 은은하고도 격조 높은 향기였다.
160p 만추여행 중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을 읽었다.
그동안 몇 번을 들었다 놓았다 한 책인지, 시도했던 시간만 따지자면 벌써 몇 년은, 몇 번은 독서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선생님이 사용하는 우리말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아, 과거에 쓰인 글이구나 싶은 주제가 있거나 시간이 켜켜이 내려앉아있는 어휘가 가득한 산문을 읽을 때면.. 정말이지 집중해서 읽는 게 영 쉽지가 않았다. 요즘 같이 도파민에 절여진 뇌로는 당연히 힘과 에너지가 들어갈 수밖에. 그야말로 시간이 필요한 글이었다. 독서에 관한 한 어디까지나 부족한 나의 인내심과 수양이 문제였다.
그래서 더더욱 붙잡고 읽었다. 그리고 좋은 말이 있으면 그 부분은 다시 읽고, 기록했다. 나에게 독서의 깊이는 필사의 유무로 갈린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이 맑고 깨끗하다. 한방 향이 솔솔 나는 쌍화차를 한 모금 마시는 기분이었달까.
‘책 가난 고금’을 보면 박완서 선생님의 책에 대한 사랑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거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책값은 헐했고, 달리 살맛이 없고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후 걸신들린 것처럼 책을 읽었다. 그 직장에서 내가 제일 고학력이라는 걸 코에 걸고 싶은 조그만 허영을 위해서도 책 읽기는 절절한 처방이었다. 소위 필독서로 치는 문학의 고전을 거의 다 독파한 게 그 시절이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궁핍하고 비참했던 그 시기를 가장 낭만이 있었던 찬란한 시절로 회상할 수 있는 것도 그 많은 책들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119p
모르는 사람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관심 있게 듣는 나다. 하물며 박완서 선생님의 책 관련 일화라니.
이 산문은 특히나 내 것으로 간직하고 싶어 필사도 열심히 해놓았다. 이 중에는 작가님의 친구네가 개점했다는 종로서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지금은 종로서점과 같은 자리였다고 해 비록 그 당시부터 완전하게 이어진 서점은 아니지만 정신만큼은 어느 정도 계승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오랜만에 종로서적 본점도 찾았더랬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글을 더 많이 읽고 쓰고 싶어진다.
한글을 더욱 탐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이렇게 예쁜 말이 있을까, 글이 우아하다. 감탄만 머금게 된다.
단풍철이 좀 지나서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로 한 날 아침부터 이슬비가 촉촉이 내려 떠날까 말까를 망설이게 했다. 숫제 장대비가 오면 떠나기를 단념하고 들어앉고 말련만, 스프레이로 뿌리듯이 시나브로 머리칼과 옷을 눅눅하게 적시는 비는 나처럼 결단성과 적극성이 모자라는 이에겐 길을 떠나기도 안 떠나기도 내키지 않게 하는 애매한 비였다.
159p
나는 할머니와의 추억담이 많지 않다. 어쩌다 보니 친가 외가가 모두 그렇게 됐다.
그래서일까, 글에서는 종종 나의 할머니의 일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일었다. 나에게 친애하는 할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말을 들려주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산문 중에는 조카에게 쓰는 편지글도 담겨 있는데, 그 대상이 나일 것이라 받아들이고 읽으면 가슴이 찡해진다.
산문집이 본 것만 해도 10권까지는 있던데, 다 읽어보는 게 작은 목표가 됐다.
그 아름다운 우리말의 글들을 머릿속에 한가득 채워 넣고 싶은 욕심이 인다. 맑고 좋은 글을 읽으면 눈빛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너무 갔나.
영광은 짧지만 고난은 길다. 또 영광은 불확실하지만 고난은 확실하다. 고난 끝에 영광을 못 얻을 수도 있고, 실은 못 안는 수가 더 많지만, 고난을 거치지 않은 영광은 동서고금을 통해 단 한 건도 없었느니라.
24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