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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리 Oct 14. 2021

오 마이 베이비 잠잠이

잠잠이 이름 짓기, 첫 태동, 젠더리빌

    아기에게 '잠잠이'라는 태명을 붙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잠을 잘 자는 아기였음해서다. 그런데 호주는 태명 짓는 문화가 한국보다 덜한가 보다. 임산부를 보면 '태명이 뭐예요?'라고 으레 묻는 한국과는 달리, 호주는 아기의 성별이나 주수 정도만 물어보지 태명을 물어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론 호주에도 태명은 존재한다. 영어로는 fetus nickname이라고 하는데 jelly bean (젤리빈), tadpole (올챙이), munchkin (먼치킨)과 같은 이름을 붙인다. 태아의 작은 크기에서 비롯된 이름이 많다.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줬으면 해서 '튼튼이, ' 사랑 듬뿍 받고 자라라고 '사랑이, ' 쑥쑥 크라고 '쑥쑥이'처럼 엄마 아빠의 소망이 이름에 투여되는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 태명 덕분인지는 몰라도 잠잠이도 엄마의 소망처럼 잠을 잘 자는 아기에 속한다.


    잠잠이의 성별을 알게 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름 짓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기 이름 하나 짓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과 호주에서 공용으로 쓰일 수 있는 글로벌한 이름이어야 했다. 엄마와 아빠의 국적을 모두 받아 한국과 호주의 선천적 복수 국적자이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남편의 성을, 한국에서는 나의 성을 따르기로 했기 때문에 양 쪽 모두의 성과 붙여놔도 이상하지 않은 이름이어야 했다. 의도와는 다른 뜻이 되어버리거나, 놀림감이 되지 않을 그런 이름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에 들어야 했다.


    엄마와 아빠의 치열한 공방 끝에 잠잠이의 이름이 정해졌다. 흔하지는 않지만 특이하지도 않은, 엄마 마음에 딱 드는 이름으로 정했다. 그렇다, 엄마의 의견이 적극 반영됐다. 그런데 잠잠이의 이름을 영어로 써놓고 보면 알파벳 수가 무려 23글자나 된다. 그중 성만 16자에 달한다. 심지어 하이픈(-)이 들어가 있는 성이라니! 남편은 세상에 몇 안 되는 특이한 성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런데 나는 잠잠이가 자기 이름 쓰는 방법을 배우다가 제 풀에 지치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서양의 임신 문화 중에 '젠더 리빌 (gender reveal)'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아기의 성별(gender)을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드러내는(reveal) 이벤트다. 보통 케이크, 폭죽, 풍선과 같은 소품을 활용하여 성별을 알린다. 가령 폭죽을 터뜨렸을 때 파란색 가루가 날리면 남아, 분홍색 가루가 날리면 여아인 식이다.


    코로나 때문에 베이비 샤워도 못했는데 젠더 리빌 파티도 불가능해졌다. 심지어는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있는 초음파 검사에 남편이 동행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아기의 성별을 듣고 싶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다가 아기의 성별을 동봉된 봉투에 담아주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기의 부모 대신 지인이 젠더 리빌 파티를 열어주는 경우, 부모가 아기의 성별을 동봉된 봉투에 받아 지인에게 건네준다는 것이다.


    남편과 함께 성별을 알고 싶으니 성별을 따로 적어 줄 수 있겠냐고 소노그래퍼에게 물었다. 소노그래퍼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정밀 초음파 중, 아기의 성기를 확인하는 순간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노그래퍼는 무의식 중에 아기를 'he' 혹은 'she'로 지칭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아기의 성별이 담긴 종이를 받아 들고 초음파 검사가 끝났다.


    남편과 함께 소노그래퍼가 준 레터 앞에 앉았다. 남아일까 여아일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원하는 성별이 아니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아기는 성별에 상관없이 축복받아야 할 존재니까.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 레터를 열었다. 종이를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A4 용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음파 사진이었다. 무슨 사진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It is a BOY!!'라고 적혀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래 사진은 당시에 받은 레터에 프린트되어있던 초음파 사진이다. 

 

이 사진 아래 'It is a BOY!'라고 적혀있었다.


    지금이야 이 사진이 아래서 올려다본 아기의 두 허벅지와 그 사이에 있는 성기 사진이라는 걸 알지만, 당시에는 무슨 사진인지 전혀 감히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등을 굽히고 옆으로 누워있는 아기의 모습이었다. 임산부 카페에 사진을 올려 도움을 받았다. 친절한 한 아들 엄마가 사진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해줬다. 당연한 말이지만 초보 부모는 초음파 사진을 보는 것조차 낯설고 어려웠다.


    처음으로 초음파를 보던 순간이 생각난다. GP에게서 임신 확인을 받고 아기의 주수와 출산 예정일을 확인하러 간 검사였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 이름이 호명되고, 소노그래퍼를 따라 좁은 복도를 통해 초음파실로 들어갔다. 초음파실에는 침대와 컴퓨터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누웠다. 안내에 따라 옷을 걷는 내 행동에서 어색함이 묻어났는지 소노그래퍼가 첫아기냐고 물었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초음파 검사가 시작되었다. 7주밖에 안 된 아기는 초음파 사진 상으로도 확대, 확대, 확대를 해야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작았다. 사람의 모습도 갖추지 못한 8mm밖에 안 되는 우리의 첫아기.


    처음으로 태동을 느낀 날도 아직 기억한다. 한국에서는 어린이 날인 5월 5일, 19주 초음파 검사를 받고 아기의 성별이 레터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뱃속에 작은 공기 방울이 일었다. 작은 방울은 내 배를 이쪽저쪽 훑었다. 손 혹은 발로 몇 번이고 툭툭 치는 느낌도 강하게 들었다. 마치 잠잠이가 '엄마, 저 여기 있어요!'하고 불어 보내는 비눗방울 같았다. 그 작은 비눗방울을 불어 보내려고 잠잠이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까. 태동을 느낀 후에는 내 뱃속에 진짜 생명이 들어있다는 벅찬 감정이 들었다. 잠잠이에게 말도 더 많이 걸고,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20대 중반, 그러니까 호주로 건너 오기도 한참 전의 일이다. 문득 비눗방울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비눗방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꽤나 열정적으로 비눗방울 속에 사는 요정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썼다. 그러다 어느 이유에선가 글쓰기를 멈췄다. '동화'를 쓴다는 게 스스로가 민망했던 모양이다. 구상하던 스토리는 고스란히 랩탑 폴더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가끔씩 비눗방울 이야기가 떠올랐다. 당시에 <비눗방울이 톡 하고 터지는 날>이라고 제목도 정해두었던 스토리다. 애정은 있는데 끝맺지 못한 채 접어두었던 게 마음에 단단히도 걸렸었나 보다. 잠잠이를 낳고, 동화를 쓰겠다고 마음먹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태동을 느끼고 이 이야기를 끝맺기로 다짐했다.



첫 태동을 회상하며 그린 그림 (좌), 엄마에게 '저 여기있어요!'라고 방울을 보내던 잠잠이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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