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아 리 Oct 21. 2021

남편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2)

남편의 2주 자가격리와 독박 육아

    세상이 무지개 꽃밭인 줄 알고 태어난 너에게 세상이 사실은 어마 무시한 바이러스로 뒤덮여있다고, 마치 영화 속 아포클립스와 같은 이 세상에 널 낳았다고 말하기가 두렵다.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몇 가지 없다. 베란다를 통해 나무를 보여주는 일, 햇살 따뜻하고 바람 좋은 날에 비눗방울을 불어주는 일, 그저 사랑한다고 한 번 더 꼬옥 안아주는 일뿐.



    잠잠이와 거실 밀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밀착된 생활이었다. 잠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청소하고, 씻고 등등... 모든 걸 잠잠이와 함께해야 했다.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할 때이니 만큼 아빠의 부재를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잠잠이의 라이프 스타일에 나를 맞추기로 했다. 그리하여 14일 동안의 독박 육아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한 규칙 몇 가지를 세웠다.


잠잠이가 밤잠/낮잠 자는 시간에 나도 자기
식사는 가족이 다 같은 시간에 (남편도 방에서)
아침과 점심 메뉴는 가족이 최대한 통일하기
잠잠이 저녁 이유식은 시판으로 대체 가능
가족과 화상통화 자주 하기


    잠잠이가 자는 시간에 나도 함께 자야 피로가 덜하다. 보통 잠잠이가 자러 가면 나는 여가시간을 즐기곤 했는데, 같은 거실에서 생활하는 데다가 독박 육아이니만큼 잠으로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그리고 식사는 가족이 모두 같은 시간에. 남편도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해서 설거지가 한 번에 나오도록 했다. 아침과 점심 메뉴는 잠잠이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통일해서 여러 요리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로 했다. 특히, 잠잠이 저녁 이유식은 시판으로 대체해서 이유식 만드는 스트레스를 줄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과 화상통화를 자주함으로써 독박 육아에서 오는 외로움과 고단함을 이겨내도록 했다.


온 가족의 메뉴를 통일하도록 한다


   별 거 아닌 거 같아 보이지만, 실로 그 효과가 대단했다. 첫날은 난데없는 2주 독박 육아라는 청천벽력에 정신적 대미지가 컸지만, 그 여파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잠잠이의 생활 습관에 나를 맞추고 충분한 잠을 자니 스트레스가 덜했다. 오히려 잠잠이와 함께 노는 시간에 더 집중하고 즐길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분유를 먹인 후 잠잠이 기분이 좋은 틈을 타 집안일을 한다. 세탁기와 청소기를 돌리고 잠잠이와 놀며 모닝커피 한 잔을 즐긴다. 11시쯤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한다. 주로 팬케이크, 프렌치토스트, 샌드위치, 과일, 시리얼 등을 준비해서 여러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도록 한다. 잠잠이가 낮잠을 자러 가면 나도 낮잠을 잔다. 낮잠에서 깬 잠잠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또 이런저런 장난감으로 놀거나 동요를 부르며 논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잠이가 동요 비디오를 시청하는 동안 설거지를 한다. 집에 있는 책들을 한 권씩 쭉 돌려 읽다 보면 어느새 자러 갈 시간. 잠잠이를 재운 후 하루의 고단함을 샤워로 씻어 보내고,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한 후에 나도 자러 간다.

    

    물론 계획대로만 일이 흘러간 것은 아니다. 아기가 밤늦게까지 안 자고 버틸 때도 있었고, 내가 잠깐 설거지하거나 화장실 가 있는 새를 못 참고 대성통곡을 할 때도 있었다. 잠잠이 목욕시키는 날이면 체력이 두 배로 소진되었고,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잠잠이를 데리고 나가야 하니 손이 두 개뿐인 게 한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빠의 부재를 느꼈을지도 모를, 엄마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을 무언가로 인해 답답하고 좌절감을 느꼈을 잠잠이에게 미안했다. 아빠가 있었으면 더 즐겁게 놀았을 텐데, 더 많이 안아줬을 텐데, 이렇게 많이 울었을 일도 없었을 텐데.


    다른 건 그냥저냥 할만한데... 설거지가 너무 힘들다. 허리 아프고 손목이 아프거나 그런 게 아니라. 잠잠이가 옆에서 칭얼거리고 울어서. 설거지하는 내내 20분씩 칭얼거리면 그 시간이 가끔은 지옥같이 느껴진다. 설거지를 내일로 미룰 수도 없고 (싫고). 보통 저녁 먹고 난 후에 설거지를 하는데 그 시각에 잠잠이 유튜브 또 틀어주기도 싫고. 잠잠이는 잠깐 혼자 놀다가도 엄마가 옆에 없고 설거지하니까 플레이팬 잡고 꺼이꺼이 운다. 잠잠이한테도 미안하고. 나도 너무 힘든 시간. - 남편의 자가격리 중 쓴 일기 중


    그래도 2주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남편은 방 밖을 나올 수는 없는 대신 손바닥만 한 베이비 모니터를 통해 계속해서 잠잠이를 지켜봤다. 잠잠이가 울면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나 대신 tv 화면에 동요 비디오를 틀어주기도 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2주의 휴가를 받은 셈인데도, 고생하는 나를 위해 밤에 자고 아침에 함께 일어나고, 함께 밥을 먹는 생활을 잘 지켜줬다.


베이비 카메라 (좌), 베이비 모니터를 통해 나와 잠잠이를 볼 수 있다 (우)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들은 귀찮을 법도 한데 매일 밤낮으로 잠잠이와 화상통화를 하며 나를 대신해 잠잠이에게 말도 걸어주고, 지켜봐 주기도 했다. 전에 일했던 카페 사장님은 우리 가족을 위해 대신 장을 봐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잠잠이와 같은 해에 태어난 아기들을 키우고 있는 친한 언니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집으로 한국 음식을 배달해주기도 했다.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고 필요한 것이 있음 말만 하라는 주변 사람들 덕분에 독박 육아 2주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물론 몸은 고단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남편과 한 집에 살면서도 화상통화로 얼굴을 마주 본다. 한 번은 남편이 페이스톡을 걸었길래 전화를 받으면서 물었다. "Where are you at?" 어디긴 어디겠어, 안방이지. 농담하고서 둘이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같이 살 140년 중에 고작 14일이니까 잘 버텨보자고 했다. - 남편의 자가격리 중 쓴 일기 중
이전 12화 남편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