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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hyeon Rhee Jan 14. 2020

역사도 예술도 모두 승자의 것

영화 『300』 그리고 영화 『아포칼립토』 Review

※ 이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한가득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 말한다. 예술도 그러하다. 역사에 관한 서술권뿐만 아니라, 예술에 관한 창작권 역시 헤게모니에서 비롯된다. 두 권리 모두 필연적으로 해석이라는 과정을 필요조건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헤게모니란 해석의 권리였다. 1세계의 이하(以下) 세계에 대한 폭력은 역사란 뒤안길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예술이라는 무대에서 가공토록 명징하다. 영화 『300』(2007)과 영화 『아포칼립토』(2006)가 바로 그 증거다.



    영화『300』은 현대의 트로피를 거머쥔 1세계의 파티에서 벌어지는 이하 세계에 대한 예술적 억압이다. 『300』은 온통 현대 서구 사회의 가치를 상징하는 스파르타의 고군분투를 위해 봉직한다. 영화의 미장센과 레토릭을 통해 점검해보자.



    먼저, 시쳇말로 패배했지만 잘 싸웠다는 표현인 ‘졌잘싸’를 위한 미장센이다. ‘민주주의’를 위시한 스파르타식 선(善)의 대척점에 위치한 페르시아라는 악(惡)은 그 몰골부터가 흉흉하다. 거인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반면, 스파르타의 군인들은 우월한 체형과 외모를 자랑하며 과대포장되었다. 즉, 그 과잉의 정도가 신화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잉의 향연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파르타 진영을 옹호토록 하는 선점효과를 준다. 쉽게 말해, 선입견을 생성하는 것이다.


피를 흘리며 항거하는 레오니다스와 흉측한 몰골의 이모탈

    다음으로, 영화의 모티프인 테르모필레 전투를 불가능에 항거한 위대한 쟁투(爭鬪)로 그리는 레토릭이다. 스파르타는 기독 사회를 상징한다. 스파르타 군의 빨간 망토 속 반나체 차림은 예수를 표상한다. 반나체의 행색은 십자가에 걸렸던 예수의 그것과 닮았고, 빨간 망토 역시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를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심지어 악마를 표상하는 이모탈과의 전투 끝에 장렬히 쓰러진 레오니다스는 인간 예수의 최후와 그 서사마저 닮았다. 레오니다스에 예수를 투사하는 것은 그에게 고결함을 부여한다. 고결함은 스파르타의 역사를 인간사의 서사를 넘어 신화의 세계로 입각토록 한다. 『300』은 관객에게 감상(感想)을 넘어 숭배(崇拜)를 요구하는 것이다.



영화 『아포칼립토』는 1세계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예술적 합리화다. 주인공 ‘재규어 발’의 생존 활극 뒤에 숨겨진 것은 서구 사회의 비겁(卑怯)한 자위다.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유럽의 군함과 16C에도 인신공양을 일삼는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문화적 간극이 주는 아찔함은 관객을 영화로부터 밀어낸다. 주인공에게 온통 몰입했던 관객이 느끼는 척력이 만들어주는 태도는 수긍(首肯)이다.


1세계가 함선을 개발하여 대양을 건넌 반면, 이하세계는 여전히 미신을 믿고 제사를 통해부족을 운영한다

    함선을 보고서 ‘우리는 숲으로 돌아가야 해.’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대사는 그와 관객 사이의 자기장마저 일거에 끊어버린다. 『아포칼립토』가 목표한 서구사회는 합리화는 이와 같은 서술을 통해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영화의 결론은 간단하다. 결국 식민지배는 필연적인 과정이었으며, 피지배의 귀책은 원주민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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