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Joker)』 Review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충돌로서 증명하는 고고(枯槁)한 악(惡)의 존엄(尊嚴)
지독히 악한 영화다. 보통의 영화에는 금도가 있다. 악당을 결코 철저한 악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악당에게 최소한 하나의 면죄부라도 주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살인을 저지른 악당이더라도 가족의 아픔이나 반성 등의 내면의 스토리를 부여해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악당이 역설적이나마 선(善)의 대변자일 수도 있으리라 추측하도록 한다.
조커가 자랑하는 악의 세계는 기존의 악과는 그 영토 자체를 달리한다. 조커의 악행들은 순도 100%의 악으로 여겨질 뿐, 결코 선의 일환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던 무리에 대한 총격 장면이 대표적이다. 조커는 관객들에게 자신이 가한 그 총격에 대한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자신이 총으로 완성한 심판은 자신이 구축한 악의 세계의 논리를 따른 것일 뿐이라는 말만 남길 뿐이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등장해야 할 피해자를 향한 동정도 복수의 정당성도 조커의 세계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조커의 위험천만(危險千萬)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조커는 영화 내내 자신이 저지르는 악행들이 악하지 않다고 결코 변론하지 않는다. 조커는 악의 군주로 군림하며 그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권(主權)에 대해 충성을 요구할 따름이다. 자기세계의 논리라는 위엄(威嚴)을 앞세우지만 조커 스스로는 여전히 악으로 존엄하는 것이다.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인류사의 권력들이 자신을 정의의 사도(使徒)라 말해왔던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이토록 악한 조커에게 어찌 관객들이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인가. 자연스러운 의문이다. 관객이 스스로의 세계를 포기한 다음에야 조커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조커가 구축한 악의 세계에는 두 개국공신(開國功臣)이 존재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다.
아폴론적 예술은 건축과 공예를 비롯하여 공간적 관념을 형상화하는 조형예술이다. 영화 조커는 상과 하의 철저한 이분법으로 구성된다. 분할의 기준은 조커의 보행(步行)과 시선이다. 조커의 보행은 계단과 비탈길을 통해 투사된다. 괴롭힘을 당한 후의 조커는 언제나 상승 보행하고 권총을 사용하는 조커는 언제나 하강 보행한다. 상승 보행 속에서 조커의 실존은 실각되고 하강 보행 속에서 조커의 실존은 옹립되는 것이다.
코미디언을 꿈꾸는 조커의 존엄은 유명 코미디언 머레이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속에 역투사된다. 가령 천장 아래 브라운관 속의 머레이를 올려보는 조커의 존엄은 그 무게중심이 낮아지고, 권총을 품고 머레이를 내려보는 조커의 존엄은 그 무게중심이 높아진다. 조커의 세계는 이처럼 아폴론적 미장센을 통해 완전성을 얻게 된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음악과 춤을 비롯한 비조형적 예술이다. 조커는 영화에서 총 7번의 춤을 선보인다. 권총을 얻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대목에서 그의 춤이 등장한다. 모두 조커의 실존(實存)이 명징(明澄)한 빛을 내뿜는 순간들이다. 조커의 춤은 4분의 3 지점에서 등장하는 계단 신(Scene)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바로 조커의 실존이 완성된 순간이다. 그렇게 관객들은 조커의 성장하는 실존에 디오니소스적으로 이입되며 그에게 찬동하게 된다.
악의 아폴론적 완전성과 디오니소스적 매력은 이율배반적이다. 조커의 세계를 목도하는 우리 관객 역시 둘의 줄다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우리 관객은 둘의 불가분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우리 관객들은 그렇게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듯 조커에 완벽하게 압도되고야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