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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령 May 15. 2020

스승의 날,  모든 선생님들께 드리는 글

  가난했던 시절 중학교에는 읽을거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집에는 뭐 더 말할 것도 없었지요. 겨우 만날 수 있는 것이 만화책 정도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공간)에 공장 다니는 언니 두 명이 들어왔어요. 자식들 공부 가르치기에 늘 모자란 돈을 조금이라도 메워 보려고 어머니가 세입자를 들이신 거지요.


  저는 졸지에 그 언니들과 함께 생활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하고 공장을 다니는 언니들이 많았어요. 그 언니들도 산업역군으로 뛰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다행히 그 언니들은 책을 좋아해서 늘 책을 빌려다 읽곤 했습니다. 저한테도 다행이었지요. 다만 그 책들이 아주 야시시한 것들이었어요.


지금도 제목이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런 유의 연애소설의 대가로는 박계형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요.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사랑이 그리워질 무렵> <영과 육의 갈림길에서> 등등... 아주 재미있는 연애소설이 많았습니다. 언니들이 그 책을 빌려오면 나는 그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읽곤 했습니다. 특히 그 안에 있는 성적 묘사 부분은 얼마나 재미있는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요. 다만 하나 부작용이 있다면 그 책에서 읽는 내용을 밤에 꿈을 꾸는 거예요. 그 꿈을 꾸고 나서는 “아니 이런 야한 꿈을 꾸다니 나는 타락했나 봐.” 하면서 깊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책을 안 읽은 것은 아닙니다.


  한 날은 정말 흥미진진한 책을 빌려 왔어요. 제목이 <청춘을 불사르고>, 이름도 멋지잖아요? 우리는 그 책을 펴 들고 불사르는 장면을 찾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아무 데에도 불을 살라놓은 곳은 없었어요.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책은 김일엽(金一葉, 1896~1971) 스님께서 당신이  비구니가 되었는가를 밝히시는 수필집이었어요.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눈에 힘주고 찾는 그런 장면은 없을 수밖에요. 결국 그 세 명은 그 책을 아무도 못 읽고 그냥 반납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아직도 <청춘을 불사르고>를 못 읽어 내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그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을 맡아 주셨던 박은목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은 윤리과목을 담당하셨는데 그리스 로마 철학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주 쉽게 설명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욱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이 읽어주시던 책들입니다. 조회나 종례 시간에 들어와서 짧은 글들을 읽어주시곤 하셨는데 그때 읽어주신 내용 가운데는 ‘탁상시계 이야기’라는 것이 있어요. 법정 스님의 《무소유》속에 나오는 짧은 수필인데, 스님이 숙소에서 탁상시계를 도둑맞았다가 결국 자기가 잃어버렸던 시계를 돈을 주고 사 오게 되는 일을 적은 글입니다. 그 일화에 끝에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는데 선생님이 그 구절을 읽어주시는데 마치 섬광처럼 그 말이 가슴속에 들어와 박히는 거예요.


그 후 어른이 되고 주머니에 책 한 권 정도 살만한 돈이 있을 때 서점에서 《무소유》가 눈에 띄자 얼른 사들었습니다. 그 책은 재산목록 1호가 되어 지금도 간간이 펼쳐봅니다. 독서지도라 하면 책 읽고 시험 보는 무엇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바로 이런 것이 독서지도의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급문고를 만들어 주셨어요. 새 책도 있고 헌 책도 있었던 것을 보면 선생님이 사비도 들이고 있던 책도 보태고 하셔서 만들어주신 거였는데 이 철딱서니 없는 저희들은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 선생님이 얼마나 수고를 하셨을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지요.


 당시 우리 반이 62명이었는데 책을 62권을 준비해 주셨어요. 그리고 한 주일 돌아가면서 읽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고등학교 1학년 동안에 적어도 5,60권은 읽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


되돌아 생각하면 그 책들 덕을 오늘까지 정말 많이 보고 있습니다. 보통 이 책 정도는 읽어라 하고 권하는 책들이 거기 다 있었거든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데미안>, <죄와 벌>.... 물론 무슨 말인지 몰라서 대충 읽은 책들도 많아요. 하지만 학교를 뒷문으로 들어갔다 앞문으로 나와도 달라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책은 재미있는 것, 읽고 싶은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조금 철이 들어서 그때 그 선생님을 찾아뵙고 감사의 절이라도 올리려고 하지만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시네요.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께 당부 말씀드립니다.


“저처럼 못난 제자가 나중에 철이 들어 찾아가서 절이라도 올릴 수 있게 선생님들 모두 건강하게 오래 계셔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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