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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령 May 18. 2020

"느낌을 더 많이 써보자."라는 말 대신에

글 쓰는 힘 기르기 ①

  글에는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이 잘 나타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느낌이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서 그게 뜻대로 잘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어떤 일을 겪고 나서 떠오르는 느낌은 참 단순할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친구들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땅따먹기도 하고 고구마 삶은 것도 먹고 이렇게 신나게 지내면서 한 일은 참 많은데 느낌을 떠올리려니 “참 재미있었다.”하는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어 놓고 “참 재미있었다.”라고 쓰게 되지요. 그러면 어른들은 그게 조금 안타까워서 “네 느낌을 좀 더 잘 표현해 보자.”하고 말해주기도 합니다. 

  또 글을 보는 편견 가운데 하나가 ‘글이란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써야 귀한 글이지, 겪은 일을 그대로 쓴 것은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분 가운데서도 "이건 사실만 늘어놓았구나. 네 느낌이나 생각이 없어. 네 느낌이나 생각을 더 써 보아라." 하는 주문을 하는 경우도 많이 만납니다. 

먼저 3학년 아이가 쓴 일기를 읽어 볼까요?      


6월 6일 일요일 (현충일 ^^) 

  오늘 나는 아주 기쁘고 즐거웠다. 이유는 성당이 끝나고 계속 놀았기 때문이다. 나는 놀이터에서 친구 세 명을 만났다. 누구냐면 일균, 대호, 학진이다. 우리 친할머니 댁에서 놀려고 하는데 친구와 갔더니 아빠가 오라는 전화가 왔었다. 

오늘 나는 느낀 게 

‘세월은 참 빨리 가는구나.’ 

빨리 안 갔으면 좋겠어요. (조금 ^^)      


이 일기에 선생님은 동그라미 표시를 세 개 해 주시면서 ‘느낀 점을 더 많이 쓰세요.’하는 도움말을 써주셨습니다.          

  이 아이는 친구들을 만나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 댁으로 가서 놀기로 했습니다. 할머니 댁에서 놀려고 하는데 아빠가 오라는 전화를 하셨네요. 실컷 놀지도 못했는데 얼른 오라는 전화를 받고 보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가버렸지?’ 싶은 마음이 되었어요. 그런 아쉬움 때문에 ‘세월은 빨리 가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쓴 것 같습니다. 

  물론 욕심을 부려 보자면 ‘글을 좀 더 자세히 쓰자. 친구들이랑 무엇을 하고 놀았니?’ 하면서 아이에게 주문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일기=글쓰기는 아니거든요. 날마다 자세하게 쓰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아이들이 보통 이런 정도로 글을 쓰게 됩니다. 

  그래도 친구를 만나 놀아서 기쁘고 즐거웠다는 것, 많이 놀지도 못했는데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 따위를 나름대로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어떤 느낌을 더 적을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사실만 늘어놓으면 가치가 없다. 느낌이나 생각을 써넣어라.’하는 말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아이의 글 한 편을 볼까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노종태(서래 초등 4) 

  나는 오늘 아람 유치원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두 명이 함께 노는 것을 보았다. 한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녀석들이 구름사다리처럼 돼 있는 고리에 매달려 놀고 있었다. 한 아이가 

"야, 우리 고리에 매달려 싸움하자!" 

"응." 

"자, 그럼 시이이이작!" 

"이얏, 내가 어 같은 꼬맹이한테 질 수야 없지." 

"사돈 넘 말하고 있네." 

두 명은 계속 매달려 있었다. 힘든 줄도 모르나 보다. 싸우다가 동시에 둘 다 떨어졌다. 

"야, 우리 무승부다. 또 하자." 

"그래." 

"시이작." 

또 막 매달려 싸우고 있었다. 구경꾼은 나 한 명이다. 

  나는 

  "얘들아, 잘해 봐!" 

하고 말했더니 두 아이는 나를 멀뚱멀뚱 보더니 계속 싸움을 하였다. 

마침내 승부가 결정되었다. 한 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긴 아이는 

  "국민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내가 ○○○을 이겼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다가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 모습을 본 두 아이는 "하하하"하고 웃었다. 두 아이는 그다음에 집으로 갔다. (아주 기분 좋은 날/보리’에서)     



  이 글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쓴 글입니다. 어디에도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나타내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하는 아이의 마음이 잘 전달돼 옵니다.     


기분 좋은 날 

이새롬 (이수 초등 2학년)

선생님께서 아침에 교실에 들어오셨다. 

"내일은 오빠 언니들이 (수능) 시험 보니까 차가 막히지 않게 우리들은 10시까지 와야 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내일은 '지각되지 않게 일찍 가야지.'를 '조금 늦게 가야지.'로 고치세요." 

"와! 와! 교실이 떠들썩했다. 우리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호범이가 나섰다. 

"그럼 늦게까지 공부해요?" 

갑자기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니." 

교실은 다시 수다쟁이로 변했다.  (‘아주 기분 좋은 날/보리’에서)  

   

  이 글에도 느낌을 나타낸 말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교실이 떠들썩해졌다 조용해졌다가 다시 ‘수다쟁이’가 되었다는 상황을 잘 적어 놓아서 교실 안 아이들의 심리 변화까지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겪은 일 (사실)을 생생하게 그려 보여 주는 글이 좋은 서사문입니다.  


저금통장 

김지혜(3학년) 

  오늘 학원을 마치고 희지랑 농협에 가 저금통장을 받고 나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통장번호, 비밀번호 등 그런 많은 번호가 생겼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손님이라는 말을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일하던 언니가 나를 보고 손님이라고 말하자 나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1993.4.1)  


    

  이 글에서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자신을 보고 손님이라고 말하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는 그 사실을 표현해 놓아서 읽는 사람에게 그때의 마음을 더 잘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느낌을 썼는가 안 썼는가 하는 것보다는 그 느낌의 바탕이 되는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고 정확하게 썼는가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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