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천양희 시인의 '지독히 다행한'을 읽고

by 글로

"나는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어떤 책에서 본 듯한 문구, 근래에 머릿속을 맴도는 문장이다.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다만 최근 나의 마음은 아주 오랫동안 졌던 큰 짐을 덜어낸 기분이다. 지난 10년간 서울에서의 삶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지독히 치열했다.


"무너져서는 안 돼. 뭐든 해야 해. 살아남아야 해."


서울에 올라온 후부터 무엇을 하든 내 머릿속에는 이 생각이 있었다. 일하고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썼다. 계속 반복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뉴스에 나온 무너진 누군가가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방향이 없었다. 살기 위해선 뭔가를 계속해야 한다. 그게 전부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 채 계속 표류하는 배처럼 말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이런 나의 모습을 하나둘 마주하게 됐다. 일상 속 강박의 틀에 나를 강하게 가둬놓고 있는 모습. 그때마다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하고 있지? 좋아서? 목적이 뭔데?"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는데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탈리아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같이 살면서 나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인데, 그동안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을 크게 가지고 살았던 것 같아. 서울에서는 누구든 그렇겠지만, 이젠 그 강박을 좀 내려놓고 싶어."


늘 생각이 많았다. 생각이 밤낮 쉬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출처 모를 의무감, 성실함,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배려심, 친절함, 나이스(nice)함. 늘 그런 말들이 내주면을 맴돌았다. 때론 지나친 피로감을 견뎌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을 조금 바꾸고 있다. 집념하지 않아도 좋다. 성실하지 않아도 되고,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럴싸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려놓아도 좋다. 몰아넣지 말고, 억지 배려라는 이름으로 너 자신을 깎아먹지도 말고.


사진=픽사베이




서울이라는 사막


이런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 읊조려 준 시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생각을 정리하고자 펼쳐든 시집. 마치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성경을 펼쳐든 크리스천처럼. 천양희 시인의 '지독히 다행한'이란 시집이었다.


얼마나 위급하고 긴박했으면 '지독히 다행'이라는 표현을 했을까. 엄마는 천양희 시인이 한 때 사랑했던 다른 시인과 이혼하고, 키우던 아이와도 이별했다고 말했다. 그건 단순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문장의 언저리에 얼마나 큰 아픔과 고독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갈 길은 먼데

무릎에다 인공관절은 넣고

지팡이는 외로 짚고 터벅터벅

서울 사막을 걸어갈 때

울지 않아도 눈이 젖어 있는 낙타처럼

내 발끝도 젖는다.


갈 데까지 걸어봐야지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가봐야지

요즈음의 내 기적은

이 길에서 저 사잇길로 나아가는 것


딱 한 걸음만 옮기고 싶은

고비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

꿇었던 뒤에도 서서 걸었던 자국


걸음걸이가 불편해도 불행하지는 않아

먼 땅을 밟고 나는 걸어가는 사람


하늘을 나는 것도 물 위를 걷는 것도

아닌데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나에게는 기적인데


길은 얼마나 많은 자국을

감추고 있어서 미로인가

발은 또 얼마나 많은 길을

숨기고 있어서 발길인가



길 따라가다 보면

서울 사막에도 오아시스는 있어

나는 긴 길의 기억을 가지려고

가끔 쉬어도 갈 것이다."


-일상의 기적, 천양희 시인


파리 '생트샤펠' 성당 근처에서


그렇다. 시인의 말대로 서울은 '정서의 사막'이다. 눈에 보이는 이 도시가 허상이라면.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빼곡한 빌딩 숲. 이곳은 욕망이 지은 유리막이다. 마음 하나 누일 곳 없이 메마른 사막이다. 시선이 너무 촘촘해 고독과 침묵을 잃어버린 도시. 땅을 딛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 이들에게 자꾸 날아보라고 정상까지 뛰어보라고 하는데, 그 길에는 이미 쓰러진 영혼의 사체가 가득 쌓여있다.


시인은 이 폐허 속에도 오아시스는 있다고 믿고 걷는다. 어떨 때는 긍정의 힘으로, 또 다른 때는 냉소의 힘으로, 그마저도 남아있지 않을 때는 타인의 말로. 억지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존재 자체를 그저 받아들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말은 삶의 의지를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놓칠 만큼 빠르게 더 이상 나를 몰아가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십만 번씩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세 사는 나무가 있다.

잎 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


-있다, 천양희 시인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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