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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Nov 10. 2018

은희경, '새의 선물'을 읽고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네. 

<자끄 프레베그의 시, '새의 선물' 전문>


은희경, 새의 선물


철부지, 철부지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한 소녀, 그녀는 소름 돋을 정도로 똑똑하다. 그녀의 이름은 '진희'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작가의 유년 시절이 궁금했다. 과하다 느껴질 만큼 강한 삶에 대한 냉소,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상상도 못 했을 생각들이다.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중략...)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는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p14>


대가족을 방불케 하는 진희네 집, 대청마루를 양쪽으로 끼고, 대문 옆에는 아담한 수돗가가 둥지를 트고 있다. 


이 소설에 위와 같은 문장은 없다. 이 문장은 필자가 쓴 것이다. 은희경 작가는 경관이나 배경보단 사람의 마음을 묘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읽는 동안 오직 인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삶의 이면을 깨달아버린 소녀가 나긋이 풀어내는 한 동네의 이야기엔, 삶에 대한 냉소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순수가 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희가 가진 냉소는 어디서 온 걸까." 


우리의 삶은 다른 삶과 연결된다. 인간의 육신이 스스로 날 수 없듯, 우린 필연적으로 '부모'라는 존재에게 씨를 받아 세상에 태어난다. 그렇게 처음 마주한 혈연이라는 세계, 이 세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삶 속 깊숙이 스며든다. 


진희네 식구들은 옹기종기 모여 살며 가족이라는 숲을 이룬다. 자급자족이라는 단어가 아주 잘 어울리듯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그들만의 끈이 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p123>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추억의 편린들'


고우나 미우나 내 새끼라는 말도 있듯, 쉴 틈 없는 사건들 속에서도 진희네 식구들은 서로 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미운 정' 덕분이다. 문득 진희가 부러웠다. 내게도 그만큼 깊게 미운 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선뜻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새의 선물'은 소설계의 종합선물세트다. 진희와 이모의 첫사랑 허석, 장군이 엄마와 최 선생의 뒤늦은 불륜 로맨스, 홍 깡패의 야밤 소동, 안타까운 공장 화재 사건, 삶은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연이어진 다각도의 줄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줄기들은 결국 하나의 뿌리, 다시 삶으로 이어진다.  


'진희'가 묘사하는 일상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다가온다. 오히려 포장하지 않아서 더욱 포근히 느껴졌다.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나 표지에 있는 은희경 작가의 사진을 들쳐보았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편안해 보였다.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 그 뒤엔 무엇이 있을까?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면? 


어쩌면 삶에 대한 적절한 냉소는 우리의 삶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은희경 작가



그녀가 말한 '새의 선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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