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영화보다 강렬한, 드라마처럼 팽팽한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의 탄생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에,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당신은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내 머릿 속의 아몬드는 어딘가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p26-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엄마와 할멈에게서 멈췄다. 그가 방향을 틀었다. 할멈이 엄마를 잡아끌었다.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남자가 엄마의 머리 위로 망치를 내려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엄마가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나동그라졌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밀었지만 할멈이 소리를 지르며 몸으로 막아섰다. 남자는 망치를 떨구곤 다른 손에 쥔 칼로 공기를 몇 차례 뱄다. 나는 유리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할멈은 고개를 저으며 온 힘을 다해 문을 막았다. 할멈은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내게 무언가를 반복해 말했다. 그러는 동안 할멈의 뒤로 남자가 다가왔다. 뒤를 돌아 남자를 본 할멈이 커다랗게 포효했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었다. 할멈의 거대한 등이 내 눈앞을 가렸다. 유리에 피가 튀었다. 빨갛게, 더 빨갛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점점 더 빨개지는 유리문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저 멀리 얼어있는 전경들이 보였다. 마치 남자와 엄마와 할멈이 한편의 연극이라도 벌이고 있다는 듯 모두들 꼼짝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모두가 관객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p55-
내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들과 같은 것, 굴곡 없이 흔한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그런 것, 튀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아몬드' 中-
사이코패스,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나를 놀릴 때 쓰던 대표적인 단어다. 엄마와 할멈은 길길이 뛰었지만 사실 나는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나는 진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여도 죄책감이든 혼돈이든 아무것도 못 느낄 테니까. 그렇게 타고났으니까.
-타고나?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말이야.
곤이가 말했다.
-p137
어딘가 길을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p153-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어떤 애들과 어울렸는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일로 절망했는지...... 그 사람이 날 만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 강남에 있는 학교에 날 처넣은 거야... 거기 가면 내가 모범적으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이라도 갈 줄 알았나 봐. 근데 첫날 가보니까 나 같은 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물인 거야. 날 보는 눈빛 하나하나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고. 그래서 깽판을 좀 쳐 줬지. 거긴 얄짤없더라. 며칠 만에 쫓겨났어.
-p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