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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Apr 23. 2019

'아몬드'를 읽고

손원평

영화보다 강렬한, 드라마처럼 팽팽한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의 탄생




아몬드





한 아이가 서 있다. 표정이 없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이 아이, 왠지 나와 많이 닮았다. 나의 이름은 '현대인'이다. 생각도 감정도 점차 져가는 현대인.  



이 책은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한 아이의 이야기다.



사람의 뇌에는 감정을 느낄 때 자극을 받는 편도체라는 부위가 있다. 감정을 느끼, 편도체에선 특정물질이 분비되어 몸으로 신호를 보내고 몸은 그맞는 신체반응을 타낸다.



우린 때로 감정이 일을 그르친다 하여 감정을 억누르려 한다. 지만 감정을 느끼는 건 몸과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고, 그로 인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존재의 증표기도 하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에,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당신은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내 머릿 속의 아몬드는 어딘가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p26-


deskgram



몇 달간 감정에 관한 책을 계속 읽었다. 일부로 선정한 건 아니다. 신기하게도 주변에서 추천한 책들이 그랬다. 지금껏 읽었던 감정서적들이 말하는 내용 종합해보면 이렇다.


감정을 잘 다루 위해선,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수용하고, 감정과의 대화를 통해 나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과 감정을 수용하고 다루는 것 엄연히 다르다. 이는 배가 파도에 휩쓸려 가는 것과 파도의 물결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차이다.


감정을 묵살하지도 무시하지도 말고 감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왜'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 가, 묻는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차분히 들여다보고 꺼내본다. 이는 우리가 감정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첫번째 단계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소설 속으로 들어가자.


소설의 화자인 윤재는 일찍 가족을 잃었다. 늘 윤재를 지켜주던 엄마와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이브, 의문의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다. 그로 인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엄마와 할멈에게서 멈췄다. 그가 방향을 틀었다. 할멈이 엄마를 잡아끌었다.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남자가 엄마의 머리 위로 망치를 내려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엄마가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나동그라졌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밀었지만 할멈이 소리를 지르며 몸으로 막아섰다. 남자는 망치를 떨구곤 다른 손에 쥔 칼로 공기를 몇 차례 뱄다. 나는 유리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할멈은 고개를 저으며 온 힘을 다해 문을 막았다. 할멈은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내게 무언가를 반복해 말했다. 그러는 동안 할멈의 뒤로 남자가 다가왔다. 뒤를 돌아 남자를 본 할멈이 커다랗게 포효했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었다. 할멈의 거대한 등이 내 눈앞을 가렸다. 유리에 피가 튀었다. 빨갛게, 더 빨갛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점점 더 빨개지는 유리문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저 멀리 얼어있는 전경들이 보였다. 마치 남자와 엄마와 할멈이 한편의 연극이라도 벌이고 있다는 듯 모두들 꼼짝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모두가 관객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p55-



위 장면을 상상해보면,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 같지만 이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경남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 방화 살인사건'을 봐도 그렇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불만을 쌓았던 한 남성의 만행,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고, 썩은 마음은 언젠가 겉으로 드러나 사회를 아프게 만든다. 사람에 따라, 상처의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일련의 아픈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다.


충격적이고 무서운 사건임에도 윤재는 덤덤히 삶을 이어 나간다. 어쩌면 윤재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점이(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삶을 지속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 길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들도 아픈 일을 하나쯤 겪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아픔을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끙끙 앓으며 살아가게 된다. 상처의 꽃들은 어떤 형태로든 피어나 우리 사회에 계속해서 얼굴을 나타낸다.




내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들과 같은 것, 굴곡 없이 흔한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그런 것, 튀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아몬드' 中-




평범한 일상이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사회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위한 평범한 전쟁이다. 하지만 그 평범함은 더 이상 평범함이 아님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평범의 기준이 점차 높아지고 그 우두머리에는 자본과 권력, 명예와 같은 순간의 꽃들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예전엔 하늘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는데, 이젠 하늘을 쳐다볼 시간조차 사라져 간다. 평범함, 평범함이란 무엇일까? 나는 평범한가? 왜 평범해야 하는가? 아니면 왜 평범하면 안되는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사이코패스,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나를 놀릴 때 쓰던 대표적인 단어다. 엄마와 할멈은 길길이 뛰었지만 사실 나는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나는 진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여도 죄책감이든 혼돈이든 아무것도 못 느낄 테니까. 그렇게 타고났으니까.

-타고나?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말이야.

곤이가 말했다.

-p137




-타고나?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말이야.


곤이의 말에 많은 공감이 되었다. 타고난다는 말, 우린 때로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우러러본다. 흙수저, 금수저 등으로 사람의 등급을 나다.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타고남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타고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또한 그렇다. 그 성질이 어떠하든 그것에 우열을 두지 않고 그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 그리고 타인의 타고남을 부러워하여 나에게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진 않는 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타고남은 말 그대로 '타고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고로 내가 타고나지 않은 걸 따라할 필 없다. 나는 나의 타고남에서 무엇이든 시작하면 된다.


인간의 타고남에 대해서 쉽게 결론 지을 순 없지만, 결코 단순하게 치부하고 끝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길을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p153-



출처 : mbc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어떤 애들과 어울렸는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일로 절망했는지...... 그 사람이 날 만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 강남에 있는 학교에 날 처넣은 거야... 거기 가면 내가 모범적으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이라도 갈 줄 알았나 봐. 근데 첫날 가보니까 나 같은 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물인 거야. 날 보는 눈빛 하나하나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고. 그래서 깽판을 좀 쳐 줬지. 거긴 얄짤없더라. 며칠 만에 쫓겨났어.

-p148


상처 받은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건 뭘까?


이에 대한 답변은 아래의 글로 대신고자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나를 만날때 뜬금없이 안아달라고 한다. 수없이 달콤하고 많은 말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 말, 안아달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준다,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잡는다, 아무 말 없이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는 처받은 인간이 할 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이다.


당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었든 간에, 나는 당신을 안아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당신의 상처들을 함께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도래할 날들에, 어떠한 일이 있든 그 일을 직시하며 신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우리가 함께 믿을 수 있는 옳은 길을 따라 나아다. 당신을 그렇게 매일매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극 중의 '윤재'와 '곤이는 서로 너무도 다른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윤재와 곤이처럼 우린 때로,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을 통해 뜻밖의 구원을 는다. 그리고 그를 통해 또 다른 사랑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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