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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May 27. 2019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빅터 프랭클


당신이 가진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자유는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죽음의수용소에서



'사방이 컴컴한 수용소 안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뭘까?'



왜 이 질문을 하냐고? 왜냐면,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완전히 자유롭다고 생각하는가? 하루에도 수백 번 직장에서 뛰쳐나가고 싶고,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떠나고 싶으며, 교실을 떠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삶은 참 어렵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면 쉬울 수도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결코 그냥저냥 살아갈 수만은 없다.  



이 책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 간 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드라마틱 반전이나 기적은 없다. 수용소안은 온통 현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혹독한 상황 속에서 필자는 도리어 담담하다. 인간이 맞닥뜨린 현실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물론 현실자체는 뀌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인간의 의식'이다. 인간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속에 살아간다. 무슨 말인지 어려운가? 계속 읽다 보면 점차 알게  것이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프랭클 박사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저신의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았다. 제일 먼저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냉정하고 초연한 궁금증을 갖는 것에서 구원을 찾는다.
 ...(중략)...
하지만 명백하게 몰상식한 이런 시련에서 더 큰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지 않는 한, 위에서 이야기한 순간적인 위안들은 그들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아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중심은 주제와 만나게 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는 없다. 각자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p18~19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오늘날엔 더욱 견디기 힘든 문장이다. 어떻게든 시련과 고난을 피하기에날들이니.


일상의 작은 습관에서도, 평생을 고민해야 할 직업에서도, 시련을 피하고자 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련에 의미를 부여하기는커녕 시련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벅차다. 어쩌면 고난의 이유생각하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과거 스토아학파는 물론 현대의 실존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가 프랭클박사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다.
p20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가슴속엔 미래에 이루어질 또 다른 찬란한 현실을 꿈꾼다. 그를 위해 지금 내게 봉착한 현실, 시련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곳 중 수용소와 가장 유사한 공간은 군대였다. 전역한 지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군대에서의 추억과 습관이 남아있다.



군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내 계급은 상병이었고 과에 지루함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동기들과 함께 현실을 불평하고 비난하는 일에 몰두했다. 아마 군인이나, 군 생활을 한 대한민국 남자라면 이런 경험을 한 번쯤 했을 것이다.



어느 날 대대에서 대대장님의 '정신교육' 시간이 있었. 대원들은 명 따라 하나 둘 교육관에 집합했다. 또 무슨 교육이냐며 투덜대는 일병 상병들도, 슬리퍼를 찍찍 끌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뒤늦게 나타 말년 병장들도, 군기가 들어 재빠르게  앞자리부터 채워앉는 이등병들도, 모두 의아한 표정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교육시작되었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정이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고, 대대장님은 북한의 현 상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교육이라 느끼며 지루해했고 그렇게 교육이 끝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브리핑이 끝나고 마지막에 대대장님 이런 말을 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인생 중 하루인 오늘 하루,  잘 보내셨습니까? 여러분이 군 생활한다고 힘든 거 전부는 아니더라도, 저도 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한 가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끔 이 군 생활에 대해서 '뭐 같다, 좆뱅이친다, 시간 낭비다'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내가 원해서 입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여러분이 지금 있는 이 순간도, 이 자리도, 이 시간도 여러분의 인생의 한 순간이지요? 내가 내 스스로 내 인생을 폄하하고 욕하는 데 누가 내 인생을 멋지고 아름답게 바라봐 주겠습니까? 저는 적어도 여러분이 귀한 내 삶의 시간을 여기서 희생하는걸, 고생하는 나를, 내 삶을, 스스로 비난하고 욕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점 있는 거 압니다. 그래도 이 안에서 배우고,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격려하고 주변의 동기들 건 후임들에게 배우고 사랑하며 서로 즐겁게 생활하다가 무사히 다시 여러분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그곳으로 여러분이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섬기고 군 생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부족한 대대장 이야기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저녁식사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머리를 돌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군 생활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고, 하나라도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상황어려움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상황을 개선해나가려는 노력은 의미가 있다.



시련의 순간을 그저 부정하고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으로 모든 대처가 끝나서는 진전이 없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코 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 속에서도 - 그 시련이 피할 수 없는 시련일 경우 -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87~188


그렇다고 억지로 의미를 찾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변지 않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면,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내가 처한 시련에 대해 유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웃으며 그 상황을 희화화하는 행위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출처 : 브런치 '서효봉'님



신경 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과 종교 中, 고든. W. 알 푸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독후감을 마무리하려 한다. 예전에 미움받을 용기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 있다. '인간 자체를 존중하는 것' 중요하단 내용의 글이었다. 인간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으나,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정리가 된 부분이 있다. 무엇이냐면, 인간이 만들고 규정한 세상의 '가치척도'에 대해 늘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인생을 오래 살아 많은 경험과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든, 아직 젊어 모든 걸 경험하고 싶응 사람이든, 각자 겪는 인생의 크고 작은 시련 속에서 독자적인 깨달음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에 따라 의미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단 점을 늘 잊지 아야 .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의미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에서



당신은 계속해서 펼쳐지는 삶의 경험들을 어떤 의미로 바라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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