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당신이 가진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자유는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프랭클 박사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저신의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았다. 제일 먼저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냉정하고 초연한 궁금증을 갖는 것에서 구원을 찾는다.
...(중략)...
하지만 명백하게 몰상식한 이런 시련에서 더 큰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지 않는 한, 위에서 이야기한 순간적인 위안들은 그들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아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중심은 주제와 만나게 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는 없다. 각자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p18~19
강제 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과거 스토아학파는 물론 현대의 실존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가 프랭클박사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다.
p20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코 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 속에서도 - 그 시련이 피할 수 없는 시련일 경우 -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87~188
신경 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과 종교 中, 고든. W. 알 푸트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의미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에서
당신은 계속해서 펼쳐지는 삶의 경험들을 어떤 의미로 바라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