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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Sep 10. 2022

유기 사회

버림받은 영혼들의 도시


▲유기 사회에 대한 고찰


요즘 '자기앞의 생(저자: 에밀 아자르)'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이 작품은 일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매춘부, 성소수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까지. 책을 읽는 내내 한국 사회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 몇 년 간 우리 사회의 유대감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유기된 존재들은 많아졌다. 툭 하고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건 쉬워졌지만,

그들을 치우고 관리하는 이들에게 인사 한 번 건네기는 어려워졌다. 연락할 수단은 차고 넘치지만 연락할 수 있는 용기와 관심은 희소해졌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초라해졌다. 얼굴을 보고 마주 앉아도 대화를 잘 나누지 못한다. 언어의 울림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데 정작 우리의 마음속에는 든 것이 별로 없다.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 도통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두꺼워지는 건 지갑과 얼굴 위의 화장뿐이다. 오랜 유기로 쇠약해진 자아를 덮을 수 있는 대체품을 찾는다. 많은 시간들이 술, 마약, 포르노, 도박, 디지털 중독 등으로 채워진다. 여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와 돈을 쏟아붓는다. 더 무서운 건 이를 알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케팅과 시장 원리에 의해 장악당한 사람들. 먹고 살기 위해 싸고 죽는 사람들. 자신의 뜻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처음 살고 싶다고 다짐했던 삶과는 너무나 많이 멀어져 버린 인생들. 


당신도 나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무신론자도 광신도도, 적당히 잘 살고 있는 당신도. 결코 우린 모두 유기당한 영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유기견 센터에서 만난 친구들 


추석 귀성길, 삼촌이 운영하는 유기견 센터에 들렀다. 센터에는 10여 마리의 강아지가 있었다. 대부분 개농장에서 구조된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처음 봤음에도 짓거나 으르렁대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삼촌은 아이들이 따뜻한 사람의 손길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해서 그렇다고 했다.


나는 그들과 교감하고 싶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 번에 그렇게 많은 강아지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본 적은 처음이었다.


"너희들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삼촌은 모든 강아지들의 대소변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료와 물로 갈아주었다. 깔끔하게 관리받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챙김을 받는 건 어찌 됐던 기분 좋은 일이니까.


마당에서 뛰어노는 그들이 아주 자유로워 보였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은 사람에게 학대받았고 또 사람을 통해 구조됐는데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라면 엄청 상처받았을 듯한데... 어쩌면 강아지들뿐 아니라 나도 수시로 유기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삶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유기니까.


이 세상에 더 이상 유기되는 이들이 없기를. 유기될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길들여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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