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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Apr 17. 2023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고

진은영 시집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은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2022년 8월 진은영




때론 시 한 편이 차오른 마음을 대변해 줄 때가 있다. 진은영의 시들이 그랬다. 어릴 적 잘려나간 화목의 의미. 어느 날 부모의 곁을 아무 유언도 없이 떠나버린 아이. 다시는 들을 수 없지만 계속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


살아야 할 이유였던 것들이 우리의 곁을 떠나가거나 상처가 되어 돌아올 때, 그제야 우린 비로소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던 모든 것들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조금은 무거운 어른이 되어가는 걸지도 모른다.





당신과 당신을 사랑한 사람들의 신념으로

신이 머물렀다 막 떠난 도시처럼

이곳이 아직 따뜻한 것이라고

조용히, 당신처럼, 비유로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아뉴스데이, 새뮤얼 바버 - 한 노동운동가에게 中, 진은영




우리의 삶에 누군가 머물렀었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고통스럽지 않은 관계라면 모르겠지만 이별이 큰 상처로 남은 관계라면 그건 누구도 축복이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축복이라고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남기고 간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 함께 한 시간 속에,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 그 향기는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언젠가 희망이라는 꽃을 피운다. 그래서 인간에게 삶의 가장 큰 동력은 사랑받았던 기억과 사랑했던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얘야

아빠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가라앉은 배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거야


-아빠 中, 진은영




죽은 사람들은 언젠가 잊힌다.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수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는 건 심연 속에 너무 깊게 그들을 묻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오래오래 기억될 수 있는 건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가 무너졌을 때 주변에서 돌보아주었던 이들 말이다.


죽음은 슬프지만 여전히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렇기에 아직은 영원하지 않기에 함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진심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 욕심부리지 말고 더 예쁜 눈으로 사랑해 줘야 하는 것.





아버지의 술 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 나간 문고리와 골목길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 길고양이, 모든 울음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 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 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당신의 고향 집에 와서 中, 진은영




어릴 적 추억 중에서 선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아픈 기억들이다. 어린 마음으로는 견뎌낼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두려운 일들. 그곳엔 부모님의 무너진 모습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했지만 서로를 아프게 했던 시절. 이젠 과거가 되었지만 여전히 떠올리면 그때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고개를 내민다. 왜 아픈 일들은 좋았던 기억보다 더 선명히 남는 걸까.


요즘은 가슴에 묻어놓았던 그 잎들을 하나씩 들춰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찢어진 잎새 사이로 그때를 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눈물이 난다.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면 또 어느새 살아갈 힘이 채워져 있다. 마치 수많은 사연과 세월을 견뎌내고도사라지지 않은 오래된 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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