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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May 20. 2023

조금은 이른 여름날의 달리기

글로 나아가는 이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창밖으론 푸른 잎사귀들이 세차게 흔들린다. 나는 조금은 이른 여름을 바라보며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옆자리, 좋아하는 그녀가 왔다 간 자리엔 알 수 없는 향기가 남아 있다. 요즘은 자주 느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들이 내게 와 있다는 걸. 하루를 살아내기에 부족하지 않은 돈, 사랑하는 사람들,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취미, 몇 권의 책, 달릴 수 있는 두 다리까지. 생각해 보니 그렇다. 살아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 없다. 정말 그렇다.




2023년 5월 1~20일까지의  러닝 기록


어제도 그제도 달렸다. 최근에는 새로운 러닝 코스를 물색하고 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 연세대학교 운동장을, 2019년부터 지금까지는 보라매 공원을 달리고 있다. 러너에게 원형의 트랙은 꼭 필요하다. 예측 가능한 코스로 심적 안정감을 주고 기록 측정에도 알맞다. 특히 집 근처에 마땅히 달릴 코스가 없는 경우엔 더 그렇다.


하지만 때론 똑같은 트랙이 아닌 새로운 코스를 달리고 싶어 진다. 그래서 일주일에 2번 정도는 신림~신도림 구간으로 이어진 도림천으로 향한다. 도림천은 지면보다 아래에 있어 공기가 선선하다. 달리다 보면 계속해서 변하는 풍경에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도림천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쉬고 있다. 족, 연인, 반려동물과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고 벤치에 앉아 통화를 한다.


출퇴근길 지하철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그들도 지옥철에서는 한껏 짓눌린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도심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원이 있는  선물은, 적당한 거리에서 오는 '쉼'이 아닐까 싶다.





일과를 끝내고 밖으로 나서면 시계는 어느새 밤 11시를 가리킨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면서 바람을 가르고 뛰고 싶은 욕구가 올라온다. 5월은 달리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늦은 시간에 뛰면 피곤하지 않냐고 묻는다. 하지만 나는 러닝을 한 후 잠에 드는 것이 훨씬 덜 피곤하다고 느낀다. 뇌가 적응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러닝은 내게 일종의 심리 안정제 역할을 한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었든, 러닝을 하고 나면 몸은 하루가 끝났다고 느낀다. 그리고 모든 걸 잊고 오늘을 떠난다. 그래서 요즘 난 심야 러너다. 또 모른다. 언젠가 아침형 러너가 될지도. 하지만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러닝 자체다. 

 





새로운 곳을 달리고 싶다. 지난 제주도 라이딩 여행의 여파가 크다. 노란 햇살 아래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곳을 달린다면 라이딩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무릎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통보다도 달리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다.   


한강을 한 바퀴 돌아도 좋겠다. 지금 기분으로는 서울을 떠나고 싶지만 러닝을 하며  한강의 정취를 온전히 느껴보는 건 또 다른 행복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지금 나는 러닝에 중독돼 있다. 마라톤이 가져다 줄 고통은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아직은 초짜라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월 250~300km를 달리게 되면 러닝에 대한 새로운 식견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하나하나씩 세계를 열어나가야 한다.





6~9월까지 국내에서는 수많은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나가고 싶은 대회들을 알아본 후 적어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순위에 들어 메달을 따거나 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지만, 수많은 러너들을 만나고 그들을 지켜보는 건 확실히 꾀나 흥미로운 일이다. 젊은 러너부터 노년의 베테랑 러너까지 정말 다양한 이들을 볼 수 있다.


지난 마라톤 대회 때도 느낀 것이지만 확실히 나이와 지구력은 큰 관계가 없다.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는 힘에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마라톤은 언제까지나 완주를 해야 하는 경기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내가 가진 젊음에 기고만장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 매력적이다. 육체에서부터 생동감과 활력이 넘친다(요즘은 이마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젊음은 자연이 준 것으로 언젠가 쇠퇴하고 만다. 우린 나이를 먹으며 꽃과 같은 젊음을 제공한 대가로 새로운 무언가를 얻어야만 한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성숙한 인격과 교양을 갖추지 못하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젊음은 결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늙기 전에 젊음의 시간을 대가로 얻어야 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러닝을 하다 보면 중년 이상의 러너들을 자주 본다. 그들과 젊은 러너들의 차이점은 단 하나다. 달리는 자세와 속도, 표정에 큰 미동이 없다는 것. 흔들리지 않는 정신은 인류의 경험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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