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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녀의 발작

by 로도스로

1시간 뒤, 고혁두와 심정순은 어느 평범한 가정집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조금 전 고혁두의 차 앞에 난입했던 손아정의 집이었다. 또한 고혁두에게 주먹을 날린 손준철의 집이기도 했다.

“아까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마치 실성이라도 한 사람처럼 행동하다 이제는 정신을 차린 손준철은 고혁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셨던 것 같던데요.”

“제 딸이 납치되는 줄로만 알고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손준철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갑자기 집을 뛰쳐나간 딸이 도로에 있었고, 낯선 차량에 타는 걸 보니 순간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만 것이다.

“얼굴에 멍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겉보기엔 매우 약해보이지만 의외로 맷집이 좋은 편이라, 멍까지 들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처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정아, 냉장고에 가서 계란 하나 가져와라.”

손아정은 멍한 표정으로 거실 구석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정아!”

손준철이 다시 부르자 그제야 손아정이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손아정의 눈은 초점이 없이 멍했다. 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손아정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고혁두가 손준철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이런 걸 여쭤봐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다만, 아까 보니 따님이 어딘가로 도망을 가려던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손준철이 한숨을 토해냈다.

“실은 저희 딸이 좀 많이 아픕니다. 괜찮을 때는 아주 멀쩡하다가 한 번씩 이렇게 정신줄을 놓아버려서 저도 통제가 잘 안 됩니다.”

고혁두는 손아중에게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그때 TV에서 뉴스가 나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우리나라의 3대 연예기획사 중 한 곳인 SYJ 엔터테인먼트가 YH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합병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오늘 두 회사의 대표이사는 인수합병을 위한 MOU를 체결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SYJ와 YH의 대표이사는 인수합병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표시했습니다.”

YH 엔테테인먼트의 오영훈 대표이사가 말했다.

“저는 그동안 저희 회사의 소속 연예인들이 꿈을 맘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또한 연예인을 꿈꾸는 어린 친구들의 희망도 소중하게 다루어왔습니다. 제가 아끼는 아이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그들의 소중한 날개가 꺾이지 않고 힘껏 날아오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간의 제 노력과 헌신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굉장히 뿌듯합니다.”

“아아아악.”

갑자기 괴성이 들렸다. 괴성이 들려온 곳은 부엌 쪽이었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손아정이었다. 손아정이 들고 있던 달걀이 바닥에 떨어져서 바닥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손아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잡더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소리 질렀다.

손준철이 재빨리 일어나서 손아정을 안았다. 그리고는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려 했다.

“아정아!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하지만 손아정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손아정은 손준철을 밀치고 일어난 뒤 냉장고로 달려갔다.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낸 뒤 TV를 향해 던졌다. 계란은 TV가 아니라 벽에 맞았다. 이번에는 계란을 통째로 꺼낸 손아정이 마구 집어던졌다. 계란은 TV 화면, 벽지, 화분 등에 부딪혔고 거실은 이내 난장판이 되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제풀에 지친 손아정이 거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이 모든 광경을 고혁두와 심정순은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울던 손아정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손아정이 잠든 걸 확인한 손준철은 손아정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뒤에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걸레를 꺼내 거실을 닦기 시작했다. 동작이 자연스러운 걸 보니 이런 일이 한두 번 겪은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혁두는 손아정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상황은 어떤지 궁금했다. 하지만 고혁두는 손준철에게 묻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게 손아정과 손준철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타인의 호기심마저 상처가 될 때가 있다. 그럴 땐 궁금함을 참는 게 예의이다.

“저도 도울게요.”

심정순이 집을 치우기 시작했고, 고혁두도 정리에 동참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오늘 두 분께 폐를 많이 끼쳤는데 이렇게까지 하시면 제가 영 불편합니다.”

“혼자서 치우시려면 한참 걸릴 겁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혁두가 테이블을 들자 심정순이 그 밑의 바닥을 닦아냈다. 얼추 정리가 끝나고나자 고혁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 여사님, 이제 저희는 그만 가볼까요?”

“이 밤에 어디를 가려고 하시나요? 혹시 괜찮으시면 오늘 저희 집에서 하루 주무시는 건 어떨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고혁두는 사양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집에서 잠을 자는 건 아무래도 불편했다.

“오늘 이래저래 죄송한 일도 많은데 이렇게 그냥 보내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저희 집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두 분이 하루 주무시기에 아주 불편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손준철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냥 물리치기도, 그렇다고 하기도 애매해서 고민하고 있던 중에 심정순이 말했다.

“변호사님! 그냥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갈까요? 어차피 이 시간에 숙소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심정순이 자고 가겠다고 맘을 먹은 건 손아정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기는 하지만, 곁에서 지켜봐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 여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혁두와 심정순은 손아정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낯선 환경이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저녁에 과거와 비슷한 상황을 겪어서 그랬던 걸까. 그날 고혁두는 꿈에서 그놈을 만났다. 그놈은 고혁두의 인생을 나락을 떨어뜨린 괴물, 바로 안강인이었다.


***

고혁두가 안강인을 처음 만난 건 검사실이었다.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안강인의 수사를 맡은 담당 검사가 고혁두였다.

“안강인 씨 맞으시죠? 거기 앉으세요.”

고혁두가 손짓으로 자리를 안내하자, 안강인은 말없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검사실에서는 검사가 왕이다. 바깥에서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던 사람도 무장해제되는 곳이 이곳 검사실이다. 권력의 최정점에 섰던 대통령도, 조 단위의 재산을 가진 재벌 회장도 검사실에만 들어오면 다른 사람이 된다. 검사실은 특유의 위엄으로 용맹을 뽐내던 맹수도 순한 양으로 만든다.

그러니 검사실에서 피의자들이 온순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건 강력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흉악범들이 더 고분고분해진다. 그 들이야말로 힘의 서열을 잘 아는 부류이다. 신체적으로 나약하거나 사회적 약자에게는 온갖 흉악한 짓을 저지른 범죄자도 검사 앞에서는 달라진다. 눈을 내리깔고는 공손한 말투가 되곤 한다.

하지만 안강인은 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매서운 눈초리로 고혁두를 쏘아보며 분노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지금부터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성명 안강인. 맞죠?”

안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한 날 애인인 송진경 씨와 같이 있었죠?”

“아이 씨X.”

안강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고혁두의 이마에 주름이 확 갔다. 하지만 이럴수록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고혁두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검사 사무실엔 냉랭한 기운이 흘렀다.

안강인은 검사실의 위압적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뻔뻔한 태도로 말했다.

“그거 이미 경찰서에서 다 이야기했는데, 같은 걸 뭘 또 묻고 그래요? 검사님, 경찰 조사 기록 안 봤어요?”

“경찰 수사와 검찰 수사는 별개이니, 경찰에서 답을 했던 내용이라도 제가 묻는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안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시겠냐고 물었습니다.”

“아, 네...네...”

안강인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검사를 우습게 보고 있어?’

고혁두의 혈압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었다. 멱살을 쥐고 “똑바로 대답하라고 이 XXX 같은 새끼야.”라고 말하는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흉악범이라도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큰일나는 시대이다. 이렇게 안하무인인 놈들은 다른 사람들은 쉽게 짓밟으면서 자기 권리는 끔찍하게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당하면 온갖 기관에 민원이나 진정을 제기하며 난리를 피운다.

“안 되겠군요. 오늘은 조사를 받을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고 다음에 다시 수사하죠.”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고혁두는 안강인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러시든가요.”

안강인은 짐짓 여유를 부렸다. 구치소에 돌아갔던 안강인은 다음날 다시 검사실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구치소에 장기간 수감 중인 재소자 중에는 검찰청 출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라도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건 장기간 재소자들 중 일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대부분의 재소자들은 검찰청 출석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검찰에 올 때는 보안을 위해 포승줄, 수갑 등을 철저하게 채운다. 신체의 자유가 더 줄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구치소와 다른 세상을 보면 상대적 박탈감도 커진다. 연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 맛집에 줄어서서 식사를 기다리는 모습,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접할 때면 초라한 제 상황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언제 조사를 받을지, 언제 조사가 끝날지를 미리 알 수 없고 검사의 처분에 따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도 힘든 일 중의 하나였다.

3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린 끝에 안강인은 고혁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은 제대로 수사받을 생각이 드나요?”

고혁두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안강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건가?’

안강인은 고혁두를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도 안 되겠군요. 돌아가시죠.”

그렇게 똑같은 일을 일주일 동안 반복했다. 하는 것도 없이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안강인은 점점 지쳐갔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에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면회도 제한되었다. 안강인의 어머니는 아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치소를 찾아왔지만,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며칠 동안 허탕을 친 안강인의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편지를 보냈다. 안강인은 삐뚤빼뚤한 엄마의 글씨를 한눈에 알아봤다.

- 사랑하는 아들, 강인아.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딱 거기까지 읽고 나서 안강인은 굵은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약하다. 결국 백기를 든 건 안강인이었다.

“똑바로 조사를 받겠습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고혁두가 슬며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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