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여유의 호흡 / 점고사리

(61화) 점순이와 각시붕어

by 로데우스


니체의 의지는 고통을 긍정하는 어린이
장밋빛(Rhodeus)의 어원은 양치식물의 당위성
보르헤스의 꿈길은 점순이의 미소


보이지 않는 재활길



제주에서는 보이는 재활이었는데, 통영에서는 보이지 않는 재활이다. 남들처럼 걷기는 하지만, 수술다리의 묵직함과 간간히 전해오는 통증은 보이지 않은 재활을 요구한다. 2km를 달리는데 1km 지점인 반환점을 돌고부터 더 힘들다. 핸드폰에 녹음된 그 넋두리

"너무 힘들어. 누가 시작을 반이라고 했냐? 산책길 끝에서 돌아오는 길은 너무 벅차다.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70고개의 헐떡임이다. 내가 지금 부정할 것은 내 고통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가라. 그것은 젊은 날의 사치다. 지금 붙잡아야 할 것은 니체의 의지이다. 그래. 내가 믿을 것은 그 의지야. 콧수염을 휘날리며 나를 바라보는 니체야. 나에게 힘을 줘라. 그 힘은 나의 재활이며, 양치식물 이야기이다. 지금은 108개의 염주 알을 준비하는 기간. 이 알을 준비하고도 염주를 만들 시간이 필요한데 이렇게 벌써 지치면 안 된다. 힘을 다오. 걷게, 허리가 아프지 않게, 니체가 최종으로 향한 어린이의 마음. 그래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마음대로의 행동이다. 내가 담고 싶은 자유 의지다."


나의 각시붕어에게 족두리를 씌우다.



양치식물 이야기를 브런치에 1주일에 1편 총 30편씩 2개의 스토리를 끝내니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제 세편째 스토리를 시작하면서 반환점을 돌고 보니 뿌듯한 마음이다. 그러나 어렵고 딱딱한 양치식물 글을 쓰는 것이 힘에 부치고, 쉬고 싶은 마음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통영살이 중 어떻게든 108개의 염주알을 준비하려고 몸부림치는 로데우스, 나는 누구인가? 그 뿌리를 찾아본다.

젊은 시절 각시붕어를 좋아했는데, 각시붕어의 혼인색과 영특함이 마음에 들었다. 각시붕어는 우리나라 고유종이고, 5cm 정도의 크기이다. 번식기가 되면 화려하고 섬세한 혼인색 때문에 "민물고기의 보석"으로 불린다. 각시붕어는 강바닥의 말조개가 입을 벌릴 때 암컷은 긴 산란관을 말조개의 입에 넣고 알을 낳는다. 이때 수컷은 정자를 뿌리고, 말조개 몸속에서 각시붕어 새끼들은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간다.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예쁜 각시붕어는 나의 애완 민물고기였다. 각시붕어가 속한 보금자리의 뜻으로 속명 rhodeus는 나의 닉이 된 후 30년이 넘었다.


점고사리 / 2020년의 이니셜



그런데 이제까지 rhodeus의 뜻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각시붕어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양식식물 이야기 후반전에 접어든 힘든 시간에 그 어원을 찾아보았는데, 놀랍게도 장밋빛이었다. 그리스어 rhodeos(ῥόδεος)에서 유래되었고, 장미(rhodon)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장밋빛의(rosy) 또는 분홍색의"라는 뜻을 지닌다. 혼인색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속명이다.

제주살이 초기 수로에서 본 점고사리의 사진에 나의 닉인 동시에 이니셜인 rhodeus를 넣은 것은 장미처럼 빨강의 강렬함과 따스한 둥지(niche)라는 이원성이 품고, 나를 양치식물, 이끼, 버섯으로 뛰어들게 한 본능이 아니었을까? 이 뜬금없는 장밋빛 해석은 내가 양치식물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다가온다.


rhodeus의 어원을 알고 나니, 전환점을 맞은 현재의 힘에 부침은 딜레마가 아니고 한발 한발 걷는데 부딪힌 돌부리로 느껴진다. 걷는 길을 잠시 멈춰 서서 나를 한번 살피면서 꾸준히 가라는 다정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일반 사람들이 양치식물에서 "성실"의 뜻을 새긴 것처럼, 나도 양치식물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마라톤 완주에서 느낀다는 아름다운 중독(Runner’s high)이란 기쁨을 느끼고 싶다.


점고사리 포장낭군 / 포막이 없다.


물가에 솜털을 뒤집어쓴 점고사리가 살고 있다. 새순도 온통 흰털을 뒤집어썼다. 김유정의 동백꽃에 점순이가 떠오른다. 점고사리의 학명은 Hypolepis punctata인데, 종명은 '반점이 있는, 점이 있는'의 뜻의 punctatus에서 왔다.

그런데 점고사리는 어디에 점이 있을까? 포막이 없이 알알이 뭉친 포자낭에 햇빛이 반사되어 점처럼 보였다. 내가 보는 양치식물의 모습이다. 그렇게 점고사리를 떠올리며 점순이 웃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것이 보르헤스가 말한 여유인 꿈길일 것이다. 이런 여유는 니체의 의지처럼 힘든 양치식물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윤활유일 것이다. 의지와 여유의 호흡이 나를 숨 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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