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영이야기, 김약국의 딸들 / 부싯깃고사리

(31화) 희망을 불씨를 지핀다

by 로데우스

제주살이 후는 통영살이다.
은퇴 후 버킷리스트 순서이다.
통영에 살면서 토영을 보았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592443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SV2DhALjlWf2l8mZew7XXCxLCEM%3D 미륵산 스케치


통영살이 후 통영의 조산이자 미수동의 뒷산인 미륵산을 올랐다. 통영시내와 다도해가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처럼 멋진 산이다. 미륵산 정상에서 통영시내를 바라보는 조각품이 있다. 연필 끝에 통영이란 글씨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다르게 보면 토영으로 보인다. 문화가 발달한 도시임을 여실히 증명하는 모습이다.

통영살이의 시작하며 박경리 소설을 읽었다. "김약국의 딸들"에는 통영의 지리를 아련하게 표현했다. 딸들의 욕망과 사랑, 배신의 시간들이 통영 곳곳에 배어있었다. 죽림고개, 안뒷산, 용화산, 남방산, 공주섬, 종이섬, 판데, 토영.... 토영은 통영, 안뒷산은 여황산, 용화산은 미륵산, 종이섬은 지도.... 검색을 하면서 통영에 대해 알면서 토영스럽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통영이 내가 선택한 제2의 삶의 두 번째 고장이다. 나의 통영은 제주처럼 자연이 주 대상이다. 토영스러운 곳을 찾으며 통영의 추억을 만드는 현재다.

tfile.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592443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46DlpMGRrYzfPZgubmZek5OHnxE%3D 부싯깃고사리의 마른 모습


제주살이 막마지 시간이 바빠 머리가 더부룩해도 자를 틈이 없었다. 통영에 와서야 동네 이발소에 갔는데 얘기를 하던 중, "통영은 10년에 3번 정도 눈이 온다."는 말을 들었다. 설마 했다. 그런데 정말 맞은 말인 것 같다. 서울에, 제주도에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데, 통영은 눈은커녕 비도 아주 적게 내리다 말았다.

산길은 메말라 먼지가 나고, 이끼는 말라 형체를 알 수 없었다. 화강암의 건조한 표면에 생물이 살기 힘든 조건이다. 때마침 강추위가 몰아쳐 가장 추운 통영의 시간이다. 제주에서 거의 매일 밖에 나가서 자연의 신비에 흥분했다. 그러나 통영은 산을 탐사해도 볼 것이 없으니 나가기 싫다. 제주가 살이 포동포동한 청년이라면, 통영은 시니어의 노약한 모습이다.

그 시무룩한 감상이 지배하는 겨울, 풍성한 제주에서 양치식물에 환호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에 현실을 버티는 시니어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통영의 메마른 바위 절벽 틈에서 배배 꼬인 채 잎 뒷면을 반짝이던 부싯깃고사리가 떠올랐다.

아~ 그렇지 통영에서는 부싯깃고사리를 보았지. 어디 그뿐인가? 개차고사리, 반들깃고사리, 구실사리... 제주에서 볼 수 없었던 고사리들을 통영에서 보았다. 풍성한 제주에서는 제주인, 메마른 통영에서는 토영인이 산다. 제주스럽다, 토영스럽다. 사는 모습이 이름을 만든다. 나 역시 제주인에서 토영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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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바위틈, 양지쪽에 부싯깃고사리가 파란 잎을 보였다. 앗, 부싯깃고사리, 빼빼 마른 잎과 대비되는 녹색의 세계, 통영에 와서 처음 흥분했던 그 순간이다. 메마른 겨울을 견디면 통영에도 싱싱한 봄과 여름이 오겠지. 야생화들이, 고사리들이, 이끼들이 배배 꼬이면서도 겨울을 견디고 있듯이, 나 역시 통영의 겨울을 메마르다 불평하지 말고, 숨을 쉬어야겠다. 제주에서 보았던 양치식물을 떠올리며 탐사의 시간, 절박했던 시간, 흥분의 시간을 상기한다. 고사리에 주었던 사랑을 더 진하게 섞는 통영의 시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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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 오니 산길의 모습이 고향에서 보았던 모습이다. 뽀송뽀송한 화강암은 제주의 울퉁불퉁한 화산암과 다르다. 오히려 제주의 화산암이 특별한 경우이다. 제주에는 부싯깃고사리가 서식하지 않고, 개부싯깃고사리를 산방산에서 보았다는 기록은 있다. 산방산은 조면암이라는 화강암 비슷한 지질로 이루어진 급경사의 화산체이다.

산방산 산방굴사 올라가는 길 주위에서 개부싯깃고사리를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화강암이 많은 통영에 와서는 여러 곳에서 부싯깃고사리를 보았다. 오랫동안 살았던 성남에서도 남한산성 성벽 틈에서 쉽게 부싯깃고사리를 볼 수 있었다.

국어사전은 "부싯깃은 부시를 치는데 불똥이 박혀서 불이 붙는 물건"이라고 표현하고, "쑥잎, 수리취 따위를 볶아서 비벼 만든다"라고 설명한다. 말라서 배배 꼬인 부싯깃고사리도 불씨를 만드는 데 사용했나 보다. 쑥잎을 종이에 싸서 불을 붙이곤 담배처럼 연기를 뻐끔거렸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옛날이란 이름으로 기억에서 서성거린다.


통영 항구의 장막은 천천히 내려진다.
간판 난간에 달맞이꽃처럼 하얀 용혜의 얼굴이 있고,
물기 찬 공기 속에 용빈의 소리 없는 통곡이 있었다.
봄이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


"김약국의 딸들" 마지막 글귀는 비극의 통곡이 절규처럼 처연하지만, 소리 없이 다가오는 봄처럼 희망의 끈을 잡고 있다. 부싯깃고사리의 불씨는 나에게 통영의 겨울을 희망으로 보란다. 이 겨울,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제주의 신비와 나의 절규를 양치식물의 이야기로 담아보자. 나의 삶, 나의 양치식물, fun fern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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