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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Sep 22. 2021

제주여행 열흘

제주 한달살기가 유행이다. 유행 따라가는 걸 좋아해서인지 오래도록 제주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6세,4세 아들둘을 나 혼자서 한달동안 돌보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코로나로 여름휴가를 가지 않았고, 추석연휴가 있었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최근들어 휴가 이야기를 계속 꺼냈고, 유치원을 가지 않는 첫째랑 함께 있는 일이 점점 부대낀다고 느껴지던 찰나였다. 떠나줘야했다. 제주도로 떠나야 할 이유들이 많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코로나 시국에 아이들을 데리고 굳이 비행기를? 어차피 남편의 휴가는 2~3일인데 추석연휴를 붙여도 길지 않고, 또 추석날 시댁에 가지 않는 것도 영 마음이 불편하고, 추석연휴는 숙소값도 비싸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가기로 하고 비행기 예약을 했다가 또 취소를 하며 안 가기로 하기도 하고, 결국은 주말에 남편이 우리를 제주도에 데려다주고, 평일엔 출근을 하고, 주말에 다시 우리를 데리고 추석 전날에 돌아가는 일정으로 결정했다.


그러면 추석날 시댁에도 갈 수 있고, 남편이 있으니 아이들과 비행기 타는 일도 수월하고, 힘들게 비행기 타고 갔는데 좀 길게 있을 수도 있고, 길게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남편도 하루씩 두 번 휴가를 내는 게 마음이 편했고 등등 다방면으로 좋은 결정 같았다.


그렇게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렌트카를 예약하고, 숙소들을 찾아보고, 아이들 음식 등을 준비하는 등 바쁜 여행준비기간을 거쳤다. 그런 준비들을 하면서 나는 살이 빠졌다. 여행일지 고행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남편은 우리와 함께 제주도를 가는 것보다 중간에 4일 혼자 있는 시간을 더 기다리는 것도 같았고, 나는 여행이 가까워지면서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이 더 커지기도 했다. 여행 떠나기 일주일 전에 화이자2차를 맞고 몸살이 심한 차에, 마침 남편이 없는 평일에 태풍도 오고 있다니, 허허 떠나기 전부터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나의 불안과는 상관없이 여행을 떠나는 날은 다가왔고, 무거운 캐리어만큼이나 내 마음은 무거웠지만 아이들은 비행기를 탄다는 설레임으로 마치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니 내 기분도 올라가는 것 같았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제주여행을 다녀왔으니, 1년 8개월정도 지났구나. 올 수 없는 곳에 온 것 같이 아득한 느낌의 제주공항의 풍경이 내 눈앞에 현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감상은 잠시, 잠투정을 심하게 하는 둘째 때문에 혼이 쏙 빠졌다. 네 살 큰 아이라 당연히 아기띠도 없고 유모차도 안 가져왔는데, 급 잠이 쏟아지는 둘째를 어찌해야 하는가. 혹시나 해서 가져온 두데기로 업어서 재우려는데, 업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래도 억지로 업어서 재웠다.



남편은 내가 부끄러월까봐 두데기로 업는 걸 반대했는데, 그정도 부끄러운 건 고려사항도 못 된다. 어쨌든 둘째를 업고 한 시간을 있었더니, 여행이 아니라 고행의 시작이구나 싶었다.

(나중에 둘째에게 "아까 왜그렇게 안 업히려고 했어?"라고 물어보니, 둘째가 "나는 이제 다리에 힘이 센데, 업히는 건 아기가 하는 거잖아"란다. 허걱..... 많이 컸구나. 너도 업히는 게 부끄러웠구나.. 남편도 둘째도 내가 업어서 편했으면서, 힘듦은 내 몫이고 부끄러움은 그들 몫인가)







첫번째 여행지는 함덕이다. 함덕은 왠지 마음이 편하다. 오랜만의 함덕해수욕장. 예전에 남편과 둘이 와서 우아하게 해수욕을 즐겼는데, 이번에는 아들둘과 함께 신나게 해변을 즐기는구나. 힘은 들지만 꽉 찬 기분이다.




지금은 날씨가 좋지만, 남편이 떠나는 월요일부터 태풍영향권이란다. 그래서 계속 불안했다. 정신이 없어서인지 휴대폰도 숙소에 두고 와서 사진을 많이 못 찍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노을도 보았다. 둘째아들을 꼭 안고서.





월요일이 되자 남편은 떠났고, 대신 태풍영향권에는 더 가까워졌다.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자주 아빠가 나간 문에 대고 "아빠 언제 오실거에요?"를 외쳤고, 비바람은 점점 거세졌고, 나는 불안했다. 하지만 이것이 모성애인가. 그럴수록 아이들과 더 신나게 놀아주려고 애썼다.



밖은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숙소 내에서는 밝고 즐겁게 보내려고 애쓴 3일이었다. 독채 펜션이라 다른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는 구조였는데, 태풍이 오는데 그런 숙소에만 있으면 더 무서울 것 같아서 일부러 사람 많은 실내에 가기도 했다. 애월안전체험장과 뽀로로랜드. 둘 다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갔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다. 특히 둘째는 뽀로로랜드가 제일 재밌는 여행지라고^^;;



어쨌든 남편의 부재가 참 크게 느껴졌던 태풍 속 애월에서의 3일이 지나고, 9박10일 일정 중 유일하게 독채펜션이 아닌 호텔에서의 1박을 위해 중문으로 이동했다. 코로나라 호텔은 불안해서 갈까말까하다가 1박만 예약했는데, 마침 그날이 태풍이 제일 심한 날이라서 정말 잘 예약했다 싶었다. 호텔 안에서 다 해결되니까 태풍이 오는지도 잘 몰랐다. 안전하게 마음편하게 잘 보낸 1박이었다.



너무 마음이 편했는지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아이들 데리고 온수풀에서 수영도 했다. 여행을 떠나면 나는 겁이 없어진다. 아이들에게 모든 걸 다 체험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에, 그 비바람에 수영복을 입혀서 수영을 했다. 아이들은 기억을 할지 안할지 모르지만, 나는 기억한다. 비오는날 내가 어린 아이 둘을 안고 온수풀에 앉아있었던 그날을.



한때 나는 "여행=호텔"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호캉스를 좋아하는데, 독채펜션으로만 다녔더니 영 여행떠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호텔에 오니 너무 좋았다. 석식뷔페는 룸으로 갖다주었고, 조식도 열심히 먹고, 이제서야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날이 열흘 중 가장 좋았던 날이다.


내 마음이 그리 편한 데에는 다음날 남편이 오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온다는 건 여행의 막바지라는 뜻이기도 했다.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아쉽기도 했다.




남편이 없는 동안의 여행지에서 다른 사람의 작은 도움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예약제인 줄 모르고 방문했는데, 마침 자리가 비었다고 들어오라고 해 준 배려. 그날 비를 뚫고 갔는데, 첨에 돌아가라고 했을 때 정말 울뻔했다. 호텔에서도 침대가드가 안전하지 않다고 키즈룸으로 룸업그레이드도 받았고, 손이 부족한 나를 대신해 우리 아이를 닦아주려고 한 호텔 직원의 손길..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도 여기 일상에 있을 때는 그런 작은 도움의 손길을 많이 내밀고 살아야겠다.


남편이 오고 여행의 막바지가 되자,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제주하면 중문으로 생각할 정도로 중문에만 많이 왔었는데, 역시 익숙한 것이 편하다고 중문에 오니 마음이 편했다. 익숙한 중문관광단지를 구경했고, 남편과 함께 완전체로 여행을 하니 더 편안한 여행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협재쪽이었다. 협재는 처음 가봤는데, 너무 좋아서 흥분이 되었다. 모든 숙소가 키즈펜션이었는데, 협재에 온 이유도 키즈펜션 후기가 좋아서였다. 남편도 협재가 너무 좋다며 앞으로 제주여행 오면 협재를 꼭 들르자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가 참 만족스러운 곳이 되었다.


태풍이 지나간 제주는 정말 맑았고 뜨거웠다. 그 맑고 뜨거운 바다 해변에서 우리 가족은 해수욕을 했다. 둘째는 앞으로 여기서 열밤을 더 자고 가겠다고 말했다. 정말 다른 세상 같은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크게 힐링을 하고 아쉬운 맘 가득 안고 대구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은 소소하게 다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역시나 내 아이들의 성장이었다. 바다도 좋았고 호텔 뷔페도 좋았고, 제주의 볼거리들도 좋았지만, 내 아이의 반짝이는 말이 참 기억에 남는다. 뽀로로랜드에 아들둘과 나 셋이서만 갔을 때였다. 놀이기구 중에 배가 있었는데, 어른과 아이 2인 또는 아이 1인만 탑승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전에 싱싱카를 첫째가 혼자 탔는데 크게 부딪혀서 좀 놀란 상태였다. 첫째가 이번에는 혼자서 못 타겠다고 해서 나는 직원에게 우리 셋을 동시에 태워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직원이 안 된다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첫째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엄마 나 갑자기 용기가 생겼어. 나는 혼자 타볼게"하는 것이다. 하지만 6세가 혼자 타기에는 꽤 무서운 구간이 있었다. 내가 안 된다고 하자, 이번에는 둘째가 감동을 준다. 절대 나랑 잠시도 떨어져있지 않으려는 둘째가 "엄마 내가 여기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하는 거다. 아이 혼자는 물론이거니와 아빠랑도 있지 않으려는 엄마껌딱지 둘째가 혼자서 기다리겠다니... 얘네들 다 컸나 싶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10월이 되면 첫째를 유치원에 보내려고 했다. 첫째에게도 계속 말했었다. 이번 여행을 다녀오면 유치원에 가야한다고. 둘째는 내내 대구에 돌아가기 싫다고 말했는데, 어느날 첫째도 대구에 가기 싫다고 강하게 말하길래 "너는 왜그래?" 했더니, "대구에 가면 유치원에 가야되잖아"한다.


그래서 보내지 않기로 했다. 아마 또 같이 있다보면 지칠 일이 많을거다. 하지만 이 순간이 정말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둘이랑 내가 함께 목욕할 수 있는 날도, 침대가 두 개인데 굳이 한 침대에서 자려고 하는 아기시절도, 나중에 캠핑카를 사서 엄마를 태우고 여행을 다닐 거라도 말하는 시기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엄마에게 뽀뽀를 해줘야 한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날도, 다 잠깐일 것이다.


너무 짧고, 귀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많이 망설이는 편이다. 하지만 다녀오면 늘 너무 잘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도 안 갔음 어쩔 뻔했나싶다. 이번 여행의 모든 것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니 곧 다시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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