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치열한 삶을 살아낸 예술가의 위로

(희망가 – 들국화)

by 피알봇

18. 치열한 삶을 살아낸 예술가의 위로

(희망가 – 들국화)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지쳤었나, 지긋지긋해졌었나... 이러다가 내 바닥을 누군가에게 들키겠구나 싶어서 스스로 조급해질 때, 제주도의 김영갑 갤러리를 찾았다.


바닥을 친 면역력을 올라가지 않고,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독해서 자꾸 속이 쓰린데 당장 닥친 업무는 조절할 수가 없었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 하소연하면 사람들은 네 몸이 먼저라고 쉬라고 하지 않나, 그 조차 할 수 없는데 같은 위로를 듣는 것도 지치는 순간. 비행기 티켓을 충동적으로 예매하고 달력에 D-Day를 표기하고 야근을 내달렸다. 그래, 이것만 마무리하면 떠난다- 나를 잡으면 가만있지 않으리- 눈에 광기를 담고.


가야지, 가봐야지.

그런데 너무 슬플 거 같아. 그런 생각으로 찾은 갤러리였다.


생을 태워, 작품에 담아낸 몰입의 시간이 마치, 고흐의 인생 같았다.

자신의 청춘과 삶을 심지처럼 활용해서 가진 예술혼을 모두 불태우고,

당 시대에서는 인정받지 못해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게 되고, 후대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함에 가슴 아파하지만 그가 남긴 예술에 감사하게 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고흐의 작품을 볼 때는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멍하니 서서 멈추게 되었다면

김영갑 갤러리의 사진들은 그 사진 중간, 어디쯤에

내가 서서 그 자연과 함께 하는 기분이 들어 움직이기 싫어졌다.


김영갑이란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도착했던 갤러리였다.

굴곡진 삶, 비운의 작가라고- 건방지게도 스스로 정의해 두고 관람을 시작한 전시였다.

'이런 기분이겠지. 작품은 아름답지만 보고 나면 마음이 쓸쓸하고 슬프겠지'라고 생각하며

앵글에 담아낸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자니,

마음에 들지 않는 옹기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깨버리고 마는 옹기장인이,

역 앞에서 딱 손에 쥐기 좋은 만큼 끊임없이 고집스럽게 깎아냈을 방망이 깎는 노인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작품을 남긴 이의 삶을 내 선입견에 가두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

전시를 보고, 갤러리 주변을 산책하면서 다시 한번 반성했다.

평생 제주를 사랑해서, 홀린 듯 혼을 다 해서 기록하고 담아내고자 했던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담을 그릇으로 고르고 가다듬은 이 갤러리(폐교에 조성)를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해가 드는 곳은 가만히 눈감고 게으름을 피워도 좋을 만큼 마음이 넉넉해졌고,

해가 들지 않은 곳은 눈을 감고 사색의 시간을 갖게 만드는 고즈넉함이 있었다.

제주를 사랑하고 기록했던 작가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기억했다.

몸이 아팠고, 그래서 작품 활동조차 쉽지 않았다는 그의 삶을 들으면서도

작가를 지지하고 응원한 사람들의 흔적과

갤러리로 가는 정원에 작가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을 담아 작품을 만들어둔 그의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제주의 오름과 자연의 위대함을 담아낸 전시관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생을 담아낸 앨범 같기도, 일기장 같기도, 박물관 같기도 했다.

그를 위해 작사/작곡을 해서 헌정곡을 만들어준 대가들이 있었고

그의 일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써서 추모한 이의 글을 마주해서 그럴 수도 있다.

음악가는 그를 위해 음악을 헌정했고, 작가는 그를 위한 글을,

조각가는 그의 갤러리에서 방문객들을 마주하는 최초의 지기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을 기록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다.

무궁무진한 순간 중에 기록된 것들만 전달되고 전수되니.

사람이 기록에 집착하는 것 역시 누군가와 나누기 위함일 텐데...

제주에 홀려 매일 오름을 찾았다는 그의 헌신 덕분에 나는 오늘, 제주 오름의 생생한 현장을,

지금은 어쩌면 훼손되었고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그 모습을 오롯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의 기록으로, 모든 이들은 제주의 모습이 어떠했고 얼마나 생동감 넘쳤는지 알게 될 것이다

제주 오름의 사계가 어떠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이곳을 사랑한 이가 있었다는 것을 모두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곳이란 걸 새기게 될 것이다.


갤러리를 뒤로 하고,

한 때 작가가 자신의 삶의 마지막에 유일하게 외출이 허락되었던 그 공간을 걸어봤다.

치열하게 살았던 만큼 찬란한 순간을 기록했고,

기록된 그 순간들 덕분에 우리는 그의 시선을 작품으로 만난다.


인생을 연료 삼아, 자신의 창작열을, 예술혼을 남김없이 소진했던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 대한 불평이나, 회피보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방법을 택했다.


좋은 작가가 있어서, 그의 삶이 처절하게 보이지만 사실 치열하게 스스로를 사랑해 낸 결과라는 걸

그의 작품이 말해줬다.

육신이 고통스러웠을 그 삶의 한 자락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시간을, 그리고 공간을 묵묵하게 견디고 찰나를 마주했던

작가의 생이 어쩌면 누구나 살아보고 싶었던, 누구나 살고자 했던 찬란한 삶이었다는 걸.


이제 안다.

나는 어떤 순간에 매혹당하고, 어떤 것에 몰입되는 것인가.

우직하게 묵묵하게 가기 위해 어떤 헌신과 희생을 해야 하더라고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는가.


그가 스스로 만들고 선택한 소명이,

어쩌면 오름이 그를 선택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그의 선택이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어떤 이의 고집을 응원하고,

도망치듯 오른 여행길에서 돌아가 상을 마주하고,

묵묵하게 내 길을 소신껏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시간을 선사한다는 것을.


인생을 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록을 시작하게 만드는 여정의 시작이 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걸

치열하게 살았고, 외면당해 외로웠을 그들에게도 위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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