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의 런저씨

(출발 – 김동률)

by 피알봇

23. 나의 런저씨

(출발 – 김동률)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 테니까


그는 나에게 매번 멈추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지금 포기하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하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내가 가장 멋있다고 추켜세워준다.

얼마나 긴 시간이든, 긴 거리든 나와 함께 달려준다.

나를 위한 동행코치이자 엄격한 감독님인 동시에

그의 응원은 힘든 순간에 1분 더, 1Km 더 뛰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당신에게도 있나, 당신만의 런저씨.


런저씨는 러닝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도록 개발된 런데이란 이름에 머무른 지니와 같은 존재이다.

조금이라도 주저앉고 나태해지려는 나에게

항상 모범적인 답안으로 다음 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존재이다.

앱 속의 존재라고 하기에는...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이기도 하다.

(런데이앱을 아는 모두는 런저씨로 대동단결된다.)

그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풀어서 설명하자니 너무 기계적이고 건설적인 느낌이라,

나의 러닝메이트라고 부르고 싶다.

함께 뛰어줄 수는 있지만 대신 뛰어줄 수 없는, 나의 인생 같은 러닝.


모두가 나에게 성실하게, 한곁같이를 주문하고,

나 역시 살아보니 인생의 가장 큰 무기는 '성실함- 꾸준하게 나아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왜 어느 순간, 아무도 대신 뛰어주지 못하는 러닝에 사람들이 입문하고

고독하고 외롭지만 끝내 내가 성취해 낼 수밖에 없는

'달리기'에 빠져드는지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물론 마라톤, 러닝에 일찍 발 담그시는 분들도 있지만... 난 버티고 버티다... 장비를 갖추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수년을 보내고, 조금씩... 밀려들어오는 물에 발을 억지로, 강제로 담그다가 지금은 한 발씩 첨벙첨벙 깊게 담그는 중이다.)


혹시라도, 나를 운동덕후 내지 러닝참여유도형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절대 노, 네버엑스.

난 개인적으로 누워서 생활하는 와식형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걷는 걸 좋아하지만 경사가 진 길을 올라가는 걸 싫어하고,

속도를 내서 땀을 흘리며 빨리 걷는 걸음도 선호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숨이 차는 삶과의 거리 두기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한결같이 이어오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처음 런데이앱을 알게 된 건 코로나 기간이었다. 체중이 늘었고, 늘었고, 또 늘었고...

체중계에 오르지 않으며 나의 현재 체중을 외면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아침에 출근길 옷이 맞지 않기 시작했다.

그때 재택근무를 간간히 하게 되었는데, 재택이라 더 번거로울 때도 있었지만

화상회의에 대비해서 블라우스에 수면바지를 입고 책상에서 근무하다가 거실 소파로 퇴근하는

그야말로 환상의 '직주근접'을 장점을 경험하면서 근무시간을 제외하면 서서히 연체동물처럼

누워있는 시간이 늘게 되었다.


누워서 뭘 보는 것만큼 편안하고, 안락한 자세가 있을까.

누워서 오래, 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적절한 시간마다 자세를 조금씩 바꿔주는 것이다.

너무 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팔이나 다리가 저릴 수도 있기 때문에, 내 상황에 맞춰서

미묘하게 각도를 틀어 자세를 바꾸며 누워있는 시간의 한계를 매일 연장해 나갔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상포진과 디스크 증세를 모두 경험하고,

급속한 손목, 팔꿈치, 어깨 통증으로 물리치료를 받다가

급기야 이어지는 야근과 마감이 다가오는 프로젝트로 무통주사를 맞으며 근무를 하면서도,

헬스클럽과 PT에 매년 초 등록으로 한해의 To Do List를 채우지만,

막상 기부천사로 거듭나며 운동과 나의 거리 두기를 철저하게 지켰던 나였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주변에 버티다 운동을 시작한 모두가 하나같이 말하는 대로)

이대로 살다가 큰일 나겠다... 나는 둘째치고 민폐가 되겠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하늘의 게시처럼... 그 순간에 나에게도 왔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허리에 통증이 있었고,

마우스를 더블클릭하는데 팔꿈치까지 찌릿한 느낌이 한번 두 번, 그러다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러다 목이 뻐근하고, 어깨가 올라가지 않고, 어느 순간에는 엉거주춤 일어나게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아프고, 근데 일을 해야 하니 버티고, 그다음에는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나 당황하고

퇴근길에 슬퍼지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패스권을 끊어서 타듯 충실하고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나서,

친구가 등록해 준 언론사 주최의 10Km 마라톤을 시작으로,

비로소... 나는 러닝장비 구매의 세계(마라톤의 세계가 아니다.)에 풍덩 빠졌다.


다들 '달리기'처럼 장비 없이 맨손으로 편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이 어디 있냐고 말한다.

그런 분들은 정말 부지런하고 자기 관리 잘하는 훌륭한 분들이다.

EBS만으로도 충실하게 수능준비를 하고, 무료 앱과 유튜브 영상만으로도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분들.

하지만 나처럼 직장생활 이외에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는 이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초기 투자를 해둬야 본전 생각을 해서 한 두 번이라도 나가게 되지...라는 쇼핑근성이 새로운 스텝을 내딛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런저씨에서 너무 멀리 돌아온 이 이야기를 이제 마무리해야겠다.

그래서, 런저씨를 만나서 잘 뛰냐고? 재미있게 뛰냐고? 실력은 좀 늘었냐고?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같아서 간결하게 답변할 수 있다. "아니"


누군가는 우연하게 시작한 운동이 너무 재미있어서 즐기게 되었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젠가...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아직이라고 덧붙인다.)

여전히 나는 필라테스가 가기 싫어서 이 나이에도, 취소할 수 있는 핑계가 될 저녁 약속이 되면 가슴이 뛰고

10Km 마라톤(사람들은 하프코스 이상만 마라톤이라고 부르고, 10km는 러닝이라고 불러야 한다지만...)을 어렵게 신청하고 출발선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고,

줄넘기는 숨차고, 스쾃은 자세가 어렵고... 갖은 핑계를 쌓아 올려, 운동과 거리 두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래도 '뛰어야지'라는 생각을 계속한다.

그 생각이 어느 날은 운동화를 신게 만들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사부작 움직이게 만든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화가 나서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고,

어떤 날은 런저씨가 꾸준하게 뛰어야 해서 48시간 쉬고 뛰어야 한다고 했는데... 를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힘들었던 나를 위로하며 쇼생크 탈출을 본다. 언젠가 나도 이 사무실에서, 지금의 생활에서 앤디처럼 멋있게 탈출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어떤 날은 신이 나기도 한다. 생각보다 숨이 차지 않아서, 어, 내 체력이 좋아졌나? 스스로 착각하게 되는 좋은 컨디션을 만나서.

어떤 날은 런저씨 칭찬을 듣는데 기분이 좋아져서 웃기도 한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좋다...라고 생각하며.


하루에 백번도 넘게 바뀌는 나의 의지박약 속에서

나에게 한결같이, 응원과 직언을 해주는 린저씨가 있어

나는 방황을 멈추고 다시 돌아온다.

런저씨는 나를 위해 예쁜 운동복을 사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고 말하며

나의 쇼핑을 정당화해 줬고,

멈추고 싶은 순간에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당신이 진정한 승자라고 우쭈쭈 해주기도 한다.

너무 힘든 날은,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던 날은 가장 쉬운 코스를 열고 런저씨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제 이 정도는 할만하군'이라는 자기 위안을 얻기도 하고,

내가 너무...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은 도전적인 코스를 열고, 겨우겨우 완주를 하면서

'아직, 나 괜찮아... 할 수 있어'라고 내가 나를 다독이기도 한다.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해주는 런저씨.


낯선 거리에 가도, 처음 가는 도시에 가서도

런저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걷고, 뛰면 금방 어색함이 사라진다.

나태함으로 현실도피를 지향하는 나의 삶에

항상 밝은 목소리로 나를 땀과 도전의 세계로 끌어내주는 런저씨.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모든 소원을 이뤄줄 만큼 전지전능하지 않지만

누워있는 나를 일어나서 걷게 만들고, 뛰게 만드는 다른 유형의 전능함을 선보이는

나의 런저씨와 앞으로도 자주 만나고, 잘 지내고 싶다.


당신에게도 런저씨같은 친구가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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