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 – 이승열)
3. 미생이 출근하는 내일을 맞이하고, 응원으로 날아오르는 법
(날아 – 이승열)
거기서 멈춰있지 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그때의 장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단순히 미생 시즌 2를 기다리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정말 기대가 되었던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 혹은 정말 정직하고 성실한 방법으로 잘 살고 있길 바라는 대리만족일 수도 있겠다.
웹툰 '미생'이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시기가 있었다.
나도 알까기 외에는 바둑알을 만져보질 않았는데 기보가 뭔지, 복기가 뭔지 검색을 해봤을 정도로 여러 번을... 곱씹으면서 읽었던 작품이었다.
우리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 '윤태호' 필명으로 웹툰을 연재 중인 거냐. 우리 부장이랑 똑같은 놈이 나와요... 등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장면이 있고, 작품 속 캐릭터에 공감이 되면서 뭉클해지게 만드는 대목이 있어 웹툰 '미생'이 드라마로 만들어질 때 우리 모두 다 기대가 컸다.
당시 내 주변에는 취업에 성공하는 친구가 나오기 시작했고, 다니는 회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음번 공채를 준비하면서 토익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가 있었고, 사이코패스 사수를 만나 회사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친구들이 생기면서 우리 모두 '진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번듯한 직장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고, 대학입시 이후에도 이렇게 끊임없는 시험의 관문이 있다는 것에 숨이 차는 동시에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겠지...라는 자기 암시와 도대체 어느 정도가 번듯한의 수준이라는 것인지 기준의 모호함 사이에서 그저 열심히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당시에 토론의 주제는 연애, 취업, 그리고 드라마(미생) 이야기였다. 단연 토론의 중심인물은 '장그래'였다. 너무 계약직의 꼬리표를 붙이는 건 잔인한다는 친구와 낙하산 아니냐, 왜 낙하산까지 대우해줘야 하냐. 장그래를 은연중에 견제하면서 무시하는 인물인 장백기를 이해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우리 모두 또 다른 미생을 시작하는 참이었다. 목에 걸고 다니는 사원증, 나의 소속을 알려주는 그 작은 장치 하나가 얼마나 사람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하는지 알아가는 시기였다.
00에 다닌다고 말하면 나에 대한 통성명에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가끔 사람보다는 그 소속이나 배경을 보게 되고, 때론 그것만 보게도 되었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나는 장그래가 나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장그래, 안영미, 장백기, 000 등장인물들에 녹아져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하나 이상은 찾아냈겠지만,
나는 장그래가 그랬다. 유독 장그래가 부러웠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낙하산으로 어려운 기회를 얻었다거나, 승부사기질이 있다거나... 그런 게 아닌 '동기' 때문이었다.
나는 경력직으로 이직을 했고, 그래서 동기랄게 없었다. 다수의 인원 속에서 나는 제대로 된 오리엔테이션을 거칠 시간이 없었고, 승진 프로젝트가 연중 돌아가는 팀에 배정되어서 나의 팀원들은 나에 대해서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둘 다 없었다. 경력직으로 조직에 들어와서, 나는 당시 누군가의 정의에 의하면 '조직 소수의 주목받는 비주류'가 된다. 어려운 순간에는 전문가로 책임을 강요받지만, 모두가 함께 공을 나눌 때는 일반직보다 연봉이 높은 계약직.
의연한 척하기에는 나는 어렸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고, 대화를 나눌 사람들이 필요했다. 장그래처럼 우리는 한 팀이라고, 질책도 하지만 감싸 안고 함께 움직이는 소속감이 부러웠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나는 그냥 내가 '동기' 같은 것을 만들기로 했다. 부럽다고 나를 봐주지 않은 집단의 비위를 맞추면서 소속되기보다는 그냥 나만의 동기들을 만들기로 했다. 내 인생이고, 내가 살아가는 내 방식으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에게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는 동기가 없이 혼자 들어온 조직이었지만, 막막하다고 현실을 외면할 수 없으니 담담하게 마주하고 묵묵하게 기회를 찾아가기로 했다.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고,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과 서로 눈치를 보면서 마음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회사에서 만난 친구가 되었다. 동창회 하려고 출근하는 곳 아니고, 동호회도 아닌데 돈 받은 만큼 책임을 다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곳이라고 조직에 자꾸 기대하는 마음을 잘라내려고 노력했는데, 그래도 힘든 마음의 무게는 메신저 수다로 덜어내고, 좋은 일을 과한 이모티콘으로 축하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각자 뇌즙을 짜내 서로의 성장을 응원했다.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면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순간, 혹은 실수할까 봐 두려워지는 순간에 난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상황을 차분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방법을 배웠다. (물론 기질 자체가 변하는 건 아니더라...) 동료를 넘어 친구와 가족의 그 중간 어디 경계를 지나며, 서로의 결혼을 출산을, 이직을, 승진을 축하하고 조언하는 '내편'을 얻었다.
생각해 본다. 장그래에게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생겼겠지.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도 장그래는 여전히 겸손하지만 승부사 기질을 가지고, 부족함을 알기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으로,
연차 쌓인 무역상사맨으로, 혹은 상사맨의 경력을 살려 자기 몫은 해낸다는 신뢰의 아이콘으로 잘 살아주기를.
일기장에 나만의 동기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그 시절 미생 속 신입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커리어를 쌓고 있을까. 완생을 향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잘 가고 있을까.
안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