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의 자리

우리가 외면한 진실이 피처럼 번질 때

by 엔시어

한 고등학교 교사가 제자의 시신을 호수에 던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

이 첫 장면만큼 강렬한 오프닝이 있을까.


이 작품은 살인사건을 다루지만,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를 집요하게 묻는 이야기다. 주인공 김준후는 은파고등학교의 담임교사. 그는 제자 채다현의 죽음을 목격한 뒤, 충동적으로 시신을 호수에 유기한다. 이후 작품은 교사와 제자의 관계, 그들이 지닌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감추려는 인간의 본능을 파헤치며 전개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의 시선을 조작하는 서사 구조다. 처음엔 단순한 ‘교사-여학생’의 비극으로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채다현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며, 또한 우리가 ‘여학생’이라고 믿었던 그 존재조차 전혀 다른 진실을 품고 있었다.

정해연은 그 반전을 통해 “성별과 정체성에 대한 사회의 고정된 시선”을 정면으로 흔든다. 이 장치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홍학의 자리’라는 제목의 의미 '누군가가 비워둔 자리', 혹은 '차지하지 못한 자리'로 되돌아오게 한다.


홍학의 자리 속의 인간은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단지 각자의 이유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로 파멸해 간다. 김준후 역시 범인인가, 피해자인가, 아니면 그저 방관자인가. 작가는 끝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언제나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홍학의 자리』는 결국 침묵의 책임을 묻는 이야기다. 학교, 가정, 사회 모두가 다현을 봤지만 아무도 진심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의 고통은 ‘문제아’, ‘불편한 학생’이라는 말로 덮였고, 어른들은 각자의 편의로 진실을 외면했다. 책은 이런 침묵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인 공모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결코 한 사람의 잘못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그 배후에는 언제나, 조용히 눈을 돌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홍학’이라는 상징은 붉은 깃털을 가진 새처럼,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존재를 뜻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존재가 얼마나 쉽게 배척당하고, 사라져 버리는지도 보여준다. 그 자리는 결국 우리 모두의 자리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다름을 이유로 침묵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외면해 온 우리 자신까지.


책을 덮은 후에도, 머릿속에는 한 문장이 오래 남는다.

“당신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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