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바산장 살인사건』

설산의 정적 속에 숨은 침묵과 죄의 기억

by 엔시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하쿠바산장 살인사건』은 눈 덮인 외딴 산장에서 벌어지는 고립된 살인극이라는 점에서 고전 추리소설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그 안에 심리적 고립과 인간 내면의 균열을 치밀하게 녹여낸다. 사건은 단순한 밀실의 퍼즐을 넘어, 인물들 사이의 숨겨진 감정, 과거의 기억, 침묵의 무게가 한 겹씩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비극으로 나아간다.


이야기의 무대는 철저히 고립된 산장이다. 외부와의 단절, 눈으로 봉인된 출입로,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물 간의 밀도 높은 상호작용은 독자로 하여금 ‘누가 범인인가’보다 ‘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에 주목하게 만든다. 히가시노는 이 작품에서 공간의 폐쇄성 자체를 하나의 장치로 활용하여, 인물의 감정을 가둬놓는다. 이들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서로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긴장과 의심 속에서 관계를 구축한다.


작품의 중심은 정교한 트릭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이다. 각자 과거에 얽힌 사연을 품고 있으며, 사건이 전개될수록 그 사연이 서서히 조각처럼 드러난다. 특히 이 작품은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구조를 택한다. 등장인물들의 무심한 시선, 회피하는 태도, 그리고 마주침을 꺼리는 대화 속에는 진실보다 더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히가시노는 이 침묵의 여백을 통해 독자에게 해석의 공간을 열어둔다.


특이한 장치로는 산장 각 방에 걸려 있는 머더구스(Mother Goose)가 있다. 겉으로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동요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연쇄 살인의 순서나 상징을 암시하는 은근한 장치로 사용된다. 머더구스는 이 작품에서 핵심 트릭이라기보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건에 서사적 리듬감을 부여하는 장식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 자체가 퍼즐을 구성하기보다는, 인물의 심리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배경 음악처럼 작용한다.


『하쿠바산장 살인사건』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후속작들과는 결이 다르다. 이 작품은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사회비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본성의 한 단면—무관심, 분노, 후회, 망각—이 어떻게 현실의 사건을 낳을 수 있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살인은 어떤 면에서 보면 갑작스럽게 폭발한 감정이 아니라, 오랜 시간 가라앉아 있던 감정의 침전물이 폭발한 결과다.


또한 이 작품의 매력은 ‘정답’이 없다는 데 있다. 모든 사실이 드러나도, 독자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다. 범인은 밝혀지지만, 그 동기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히가시노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의 감정을 추측하고, 얼마나 자주 그것을 오해하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 모호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다. 명쾌한 해답이 아닌 여운, 그리고 침묵.


『하쿠바산장 살인사건』은 격정적인 반전이나 극적인 구조 대신, 조용한 정적과 인물 간의 미묘한 심리선 위에서 사건을 전개한다. 머더구스는 그 위에 얹힌 섬세한 무늬일 뿐, 진짜 살인의 원인은 눈으로 덮인 산장 깊숙이, 인간의 감정 안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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