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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온 결 Jan 20. 2024

전원주택의 하얀 책장

책장 앞에서, 나는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나는 한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 앙드레지드 >     


택배 상자     


“엄마, 현관에 저건 뭐야?”


딸아이가 물었다. 이제 네 살이 되는 딸은 이 세상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아 잠도 일찍 잘 수없고, 먹을 때조차 계속 입을 움직여야한다. 현관에 커다란 상자를 가리키며 나를 따라다닌다.


“응~ 저건 엄마 장난감이야~ 아빠가 조립해 줘야해~”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아이라 내가 먼저 새로 사 둔 장난감을 꺼내 그녀의 눈앞에 흘려둔다. 성공이다. 더 이상 아이가 나를 따라다니며 저 상자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  현관에 쿠팡 딱지가 붙은 택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10월에 시켜놓은 책장인데, 12월 중순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조립이 어려워 여태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 커다란 상자를 볼 때면 울화통이 터진다. 아무리 바빠도 이것하나 조립을 못한단 말인가? 공구상자가 필요하다는 남편에게 화살이 꽂힌다.   

   

 실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조립일텐데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손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작가라면 당연히 멋진 서재가 있을 것이고, 그 서재엔 근사한 책장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들을 닮고 싶어 글은 쓰지 않고 엉뚱한 책장을 주문해 애꿎은 남편을 타박하며 오전을 보냈다.     

 

그날 오후     

아이 하원 후 겨우겨우 달래가며 씻기고, 말리고, 로션을 발라준다. 불편하다는 아이의 징징대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다보면 입맛도 없어지고,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안마시던 아이스커피를 자주 마시게 된 것도 이런 울화통을 혼자 삭여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막 아이를 씻기고 아이가 좋아하는 핼로 카봇을 켜주며 한숨 돌리는데, 현관에서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아빠다!” 하며 잠시 소리지르고는 다시 티비를 본다. 웬일로 일찍 들어왔나 싶은 마음에 중문을 열고 나가본다.


 손에 새것처럼 보이는 공구상자를 들고 서있다. 남편은 나에게 보란 듯이 상자를 살짝 흔들어 보이더니 바닥에 내려둔다. 마치 생일날 케이크 상자를 꺼내듯이 신이 난 얼굴로 공구상자를 여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공구상자 여는 일이 뭐가 그리 신이날까? 반짝이는 은색과 불투명하고 모기조차 미끄러지지 않을 거 같은 손잡이는 검은 색으로 무장한 드라이버와 몇가지 도구들이 있다. 남편은 곱게 반으로 접힌 설명서를 들어 내용일랑 보지도 않은 채 그것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버린다. 나는 악 소리를 내며 다시 설명서를 꺼내 남편 어깨 뒤에서 책장 조립을 돕는다. 딸아이는 아직 티비 앞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간간이 아빠와 엄마를 부르며 현관에서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 않음을 확인할 뿐이다. 나와 남편은 딸아이의 부름에 부지런히 대답하며 그녀가 가까이 오지 않아도 됨을 알려준다. 아이가 가까이 오면 일이 더뎌짐을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     

 설명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러나 설명서만큼 조립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이제 묵직한 책장을 현관에서 거실로 옮겨야한다. 나는 재빨리 책장 놓을 자리를 마련하여 남편에게 사인을 준다. 아이는 드디어 뭔가 새로운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위험하니까 저리가 저리가 이야기해도 아빠가 들고 오는 책장에 관심이 많다. 아빠가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어 오는 커다란 책장을 함께 들겠다고 발 앞에서 이리 저리 힘을 보태려고 한다.      

 커다랗고 하얀 책장은 마치 남편 같았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커다랗고 하얀 얼굴이 기억난다. 멀끔하고 부드러웠던 예전의 남편 말이다. 드디어 듬직한 남편 같은 책장이 내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큰일이다. 책장이 완성되기 전에는 책장이 있어야 비로소 멋진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책장이 완성되니 툭 튀어나와야 할 멋진 글이 써 지질 않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근사한 책장 앞에서 눈을 뗄 수 없이 재미난 이야기의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일단 커피가 필요하다. 아이와 남편에게 우유가 떨어졌다는 너무 뻔 한 핑계를 대고 차키를 들고 나왔다. 듬직하고 하얀 책장에게서 빨리 도망쳐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둑해진 골목을 차로 빠져나와 잔잔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커피숍 주차장에 차를 멈춘다. 시동은 끄지 않았다. 정작 커피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책장 앞에 서야하는 나를 생각했다. 할 수 있어. 나는 글을 쓸 수 있어.     

 

손에 우유가 아닌 커피를 들고 들어오는 나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대로 티비를 보며 새로 사다준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며 스스로 저녁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남편은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질 않고 있었다. 퇴근 후 화장실 변기에 앉아 핸드폰 보는 시간이 그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다. 나 역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인기척만 내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거리에서 옛 연인을 만나 못 본 척 지나가듯 책장을 스쳐지나 식탁에 앉았다. 커피가 식은땀을 흘리듯 물방울이 계속 흐르고 있다. 책장은 나를 바라본다.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날 밤     

 남편과 아이는 넓직한 패밀리 침대에서 서로 붙어 좁게 잠을 잔다.

피곤해서 기절할 거 같은 기분이 드는 날에도 아이가 잠들면, 몸을 가벼워지고 눈이 맑아진다.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말이다. 남편과 아이의 숨소리를 가르며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두운 방 안을 빠져나왔다. 새로 산 정수기의 시원시원해 보이는 파란 LED 조명이 부엌을 비춰주고 있다. 식탁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빼두고 따뜻한 물 한잔을 컵에 가득 채워와 앉는다.

 캐나다에 가고 싶어서 주문한 캐나다 국기가 그려진 컵이다. 이 컵을 사면, 당장이라도 캐나다행 비행기표가 손에 들어올거 같았다. 3년 전 사둔 컵이다. 아이가 생기고 코로나19가 덮쳐 이제는 캐나다가 지도에서 더 멀게 느껴지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아마도 절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저 기념컵이면 되는 그런 나라. 캐나다. 가득 채워 온 물은 마시지도 않고 노트북 옆에 둔다. 마치 글쓰기 전 의식같은 것이다. 예전 장독대 옆에 하얀 그릇에 맑은 물을 떠놓고 아낙들이 그들의 깊은 바람들을 담아 두었던 것처럼 말이다.      

 노트북을 켜고 예전 여권번호를 비밀번호 칸에 넣는다. 여권번호조차 너무 신기하고 소중했던 시절 장만한 노트북이다. 여권이 그 이후로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 아직도 첫 여권 번호를 비밀번호로 쓰고 있다. 잊지 못하는 전남친을 몰래 노트북 맨 앞에 가두어 두듯이.


 한글 파일로 들어가 끼적여 둔 창들을 열어본다. 시작은 설레임으로 시작한 글들인데 더 이상 보여줄 카드가 없는 글들이다. 다 식어버린 커피는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마시려 해도 손이 안가는 것처럼 파일 안에 글들이 식상하게 느껴졌다. 익숙하지만 손이 가지 않는 글들이다. 새로운 창을 열어 두고 잠시 책장을 보았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곁눈질 해가며 내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책장을 바라본다. 내 시선을 피하려고 딴청 부리며 서 있는 책장이다. 전시하기 좋은 책들을 먼저 넣어두고 빈 공간이 넉넉하다.공간에 여유가 느껴져서 덜 답답하다. 내일이면 아이 물건들과 버리지 못하는 나의 잡다한 물건들로 그 공간이 채워지겠지. 그때까지 저 빈 공간의 여유를 눈으로 실컷 즐겨보리라.


 한글파일의 새 창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채워보라 나를 채워보라 이야기한다.  일단,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본다. 나는 글이라는 것은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손 끝에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이다. 한번 글이 시작되면 손가락이 움직이는대로 쓰여진다. 펜으로 글을 쓸 때는 머릿속 생각들이 손을 통해 펜으로 새어나오듯 흘러 나오는데, 키보드위에 손을 올리면 머리보다는 손가락이 손 끝에 있는 뇌에서 생각해 낸 이야기들을 쓰는 것이다. 이야기가 잘 써지지 않을때면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생각들을 정리하고 빈자리를 마련하면 그 자리에 자연스레 새로운 글감들이 찾아와 앉는다.       

 

집안 물건들이야 눈에 띄는대로 잡아 정리하면 되는데, 머릿속 복잡하고 어수선한 생각들은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땐 잠시 창을 열어 넓은 정원을 바라본다. 큰 돈주고 심어둔 세 그루의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생각들이 많이 정리된다. 작가들이 사는 집이 넓고 나무가 많은 이유는 많은 생각들을 쉽게 정리해주는 깔끔한 조경 때문이리라. 머리도 식히고 생각도 정리되었다고 믿은 후 다시 자리에 앉는다.      

 자 이제 글을 써보자.


뒤집어 놓은 핸드폰에서 카톡, 카톡, 소리가 난다.

저 핸드폰을 들면 오늘 밤 글쓰기는 끝이다.      

 당근,당근...알림을 꺼두지 않아 계속 당근 알림이 울린다. 아이를 재운 엄마들이 당근을 시작하는 시간이리라. 이 시간이면 당근 알림이 제법 울려댄다.


 당근 거래하며 만난 한 여자가 나의 빈자리에 들어왔다. 그녀와 만난 어둑어둑했던 저녁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밤은 그녀를 앉혀두고 글을 쓸 수 있을거 같다. 손 끝의 키보드가 경쾌한 소리를 내면, 한글 파일의 하얀 공간이 채워져 간다.     


그런 나를 커다란 하얀 책장이 몸을 돌려 앉아 한참을 쳐다본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지만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는 않는다. 혼잣말로 ‘나도 알아~’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입을 다문다.      

책장은 벽에 넓은 등을 기대고 선 채로 나를 바라본다. 그도 웃음을 짓는듯하다.

예전에는 조용한 곳에서 나 혼자 글쓰는게 좋았는데, 이렇게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지켜봐주는 느낌도 이제는 든든하게 느껴진다. 나를 응원해주는 친구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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