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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kko Oct 07. 2024

좀비지만 괜찮아

Chapter 3. 자존감은 코어에서 나온다

세번째 글이 되어서야 밝히지만, 나의 증상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코어가 없다"이다. 숨 쉬는 것도, 먹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이와 관련된 기관들이 자발적인 움직임을 멈춘다. 억지로 다그쳐야 그나마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을 인심 써주듯이 해준다.


항상 이런 상태인 것은 아니지만 벌써 10월 중반을 지나고 있는데, 일수로 세면 올해의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그나마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작년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성적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날에는 모든 감각들이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다. 즐겨 듣던 노래도 처음 듣는 것처럼 음장과 디테일이 더 풍부하게 들리고, 삼삼했던 반찬도 소재의 풍미가 향긋하게 코에 닿는다. 변한 것 없이 나를 둘러싼 환경은 명도 높은 색채로 눈을 자극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피곤한 와중에도, 어릴 적 엄마가 늦잠 자는 나의 전신을 주물러 주던 때와 같이, 세로토닌이 퍼지는 기분을 느끼며 수월하게 몸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부은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별다른 clue도 없는 자존감을 느끼며 출근할 준비를 시작한다.


회사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오랜만에 마주친 동료의 얼굴이 반갑다. 하지만 갑자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아직 다 낫지 않은 것이다.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어 반갑다는 듯이 근황토크를 이어간다. 반가운 마음은 진심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반갑다며 자연스럽게 올라와야 할 그 감정을 마음만큼 음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정말로 반가웠는데. 감정조차 둔해지고, 그저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차고 만다.


왜 이런 증상을 겪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답답함. 그리고 조금 괜찮아졌다 싶으면 다시 내리꽂는 롤러코스터 같은 희망고문. 직업의 귀천을 논할 생각은 없지만, 학력이나 경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마트 종업원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면, 자연스럽게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심연을 향한다.


그런 날에는 그저 침대에 누워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들숨에 숨을 헥헥대며 잠을 청하며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아플 땐 감정조차 둔해져서 깊은 슬픔에조차 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몸뚱이뿐 아니라 마음도 좀비가 되어, 저차원적인 감정에 머물며 연명해 온 것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자존감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 정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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