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흐려졌지만,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단어가 사라졌다.
방금 떠올렸던 말이 ,
지금 머리속에서 빠져나간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희미해지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잊는다.
생각이 흐르다 끊기고,
다시 이어붙이려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이게 단순한 건망증이라면,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대화 중 멍해진 나를 보며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았기를 바라고,
그 바람조차 잊고
또다시 나를 책망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된다.
ADHD는 집중을 흩뜨리고,
불안은 기억을 흐리게 만든다.
우울은 그 모든 과정 위에
'나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나는 자주 스스로를 의심했다.
왜 이정도도 기억 못 하지?
왜 이렇게 산만하고 무능할까?
그리고 그 의심은 어느새 확신이 되어
하루를 통째로 무겁게 만들었다.
그 기억의 흐려짐은
단지 오늘 하루만의 문제가 아니였다.
조금 더 멀리 돌아가 보려 해도,
마음속이 자꾸 멍해진다.
즐거웠던 순간도, 아팠던 기억도
정확하게 붙잡히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를 잃어버렸던 것 같다는 기분.
그러다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그건 당신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당신의 뇌가
너무 많은 걸 감당하고 있는 거에요.
지키기 위해, 일부러 놓는 거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내가 나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기억을 붙잡지 못하는 날들에도
나는 분명히 숨 쉬었고,
밥을 먹었고, 사람을 마주했고,
작게라도 나를 견디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이건 단순히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지 않는 나의 방식이기도 했다는 것을.
너무 아프고 복잡해서,
무의식이 나를 지키기 위해
덮어둔 기억들.
그건 잊은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금도 자꾸 잊고,
집중하지 못하고,
중요한 걸 또 놓쳐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되뇌려 한다.
기억하지 못한 날에도,
나는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