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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김미 Jun 21. 2024

부부에게 티키타카란

부재 속에서 깨달은 존재


2019년, 뙤약볕 아래에서 시도 떼도 없이 매미가 울었다. 영어 과외를 끝내자마자 자취방에 돌아왔다. 서둘러 에어컨을 켜고 컴퓨터 앞에서 땀을 식혔다. 졸업을 1년 앞두고 교내활동을 하나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에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에 올라온 공고문을 확인하다 관심 가는 활동을 찾았다. 국제교류처에서 진행하는 버디 프로그램이었다. 취지는 교환학생들에게 한국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서류 심사와 2차 영어 인터뷰를 마친 후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다. 내 이름 석자를 보는 게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개강 하루 전, 짝이 된 디를 만나기 위해 숙사를 찾아갔다. 입주날이라 기숙사 주변에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버디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핑크색 후디와 뽀글 머리를 한 버디의 이름을 불렀다. 옆에는 키가 크고 하얀색 티셔츠와 청색 바지를 입은 친구가 함께 있었다. 버디가 꼬드겨서 한국으로 같이 교환학생으로 왔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모인 김에 학교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당가는 길 내내 버디는 수다쟁이처럼 말이 많았고 그의 친구는 왠지 차갑고 무뚝뚝해 보였다.


인싸였던 버디는 한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버디의 친구와 가까워졌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그에게 밥을 먹자고 연락했고, 밤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산책을 했다. 몇 바퀴 돌았는지 셀 없을 만큼 자주 그리고 오래도록 얘기를 나눴다. 어딜 가든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느린 걸음을 기다려주는 든든한 친구였다.

어느덧 매미는 울음을 그쳤고, 거리를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도 종적을 감췄다. 차가운 바람에 외투를 여미고, 사람들은 김이 나는 포장마차 주변으로 모였다. 그날은 버디의 친구와 시내에 가는 택시 안이었다. 남자친구도 아닌데 차가워진 내 손을 잡고 호호 입김을 불어 주었다. 어김없이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그에게 결국 한 마디 했다.


'너 좋아해?'  


다음 날은 둘이서 부산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어제의 기억이 없다는 듯 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오후에 부산역에 내렸지만 겨울이라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근처 시내에 다. 매년 크리스마스트리 축제가 열리는 그곳은 반짝이는 조명들로 빛나고 있었다. 둘이서 저녁을 먹고 근처 공원에 갔다. 한참을 걸어가니 한적한 곳에 흔들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찬 공기를 마셨다. 갑자기 그가 대화의 물꼬를 틀었. 지난밤 질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하루가 지나서 속마음을 고백했고 우리는 그날로 연인이 되었다. 그가  떠난다는 걸 알면서도 시작한 보통의 연애였다. 휴대폰에는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디데이가 추가되었다. 근데 왜 만나는 날이 하루 늘면 헤어질 날은 하루 더 가까워지는 걸까.


그가 떠나는 날이었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히터로 데워진 온기 덕분에 추위는 금세 달아났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창가에는 붉은 노을비췄다. 4시간  깜깜한 밤이 돼서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서둘러 체크인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든 비행기 티켓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는 출국장 앞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한 달이 지나고 뉴스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보도되었다. 이내  세계적으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비행기는 종적을 감췄고 하늘길은 닫혀버렸다. 약속했던 시간은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에피소드는 해피엔딩이다.


2022년 11월 5일,

많은 축복 속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주말 오전, 회색빛 하늘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모닝 샤워를 끝내고 노트북을 켰다. 한참 동안 글을 쓰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밖으로 어스름했던 하늘은 맑게 개여 있다. 문득 며칠 전에 읽었던 익명의 글이 떠올랐다. 


'신랑과 티키타카가 안 돼요. 진지한 얘기만 할 줄 알고.. 왜 자상한 모습만 보고 이 사람이랑 결혼했을까요.'


안타까운 사연이다. 근데 왜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을까.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란 생각에 안도감도 들었다. 우리는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연애를 했다. 정식 채용 전에 인턴 기간을 거치듯,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났다.


그건 바로 티키타카의 부재였다.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문제였다. 우리 사이에 티키타카가 잘 되는지, 대화가 잘 통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날에는 재미가 좀 부족해도 그 자리를 채워주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특히 한국의 삶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평일엔 취미 생활과 운동을 즐겼고, 주말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스트레스를 털어버렸다. 일을 마치고 그와 함께 보내는 저녁 시간도 즐거웠다. 모국어가 다르지만 말하는 걸 좋아하는 와이프와 들어주는 걸 잘하는 남편의 쿵짝은 잘 맞았다. 그때의 삶에는 이런 고민이 부재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 온 이후로 본격적인 주부의 삶이 시작다. 역시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하루종일 집에서 보내는 도돌이표 일상 덕분에 남편과 얘기할 거리는 점점 줄었다. 한 달에 한 번 호르몬 변화가 생길 때는 즐거움의 부재를 눈물로 만끽했다. 지루함을 떨쳐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 바뀌는 건 없었다. 그와 주고받는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저녁을 먹을 때마다 넷플릭스를 켜고 말았다.


우리 사이에는 또 다른 장벽이 있다. 서로의 모국어와 살아온 문화가 다르다. 그러다 보니 공감대 형성에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유튜브에서 '000 레전드 편'을 본다거나, 향수에 젖어드는 2000년대 초 영상을 봐도 혼자서 시절의 그리움을 느낀다. 가끔 남편이 박장대소를 하며 휴대폰을 건넨다. 화면 속에는 영어로 된 밈이나 짤이 있다. 웃으려고 해도 웃음이 나질 않았다.


우리의 개그코드가 이렇게 달랐던가.




익명의 글에 달린 댓글이 눈에 띄었다.


'티키타카 중요하죠. 하지만 자상하기가 더 어려워요. 그 사람의 장점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요?'


장점이라, 그렇다. 장점은 바로 사랑에 빠진 계기이자 결혼을 결심한 이유였다.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의 유머 감각에 호감을 느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다정하고 감정 기복이 적은 그 모습을 좋아했다. 한 때는 그 사람의 존재를 인생의 선물처럼 여겼는데 어쩌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걸까.

부엌에서는 남편이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뒤에서 그를 꼭 끌어안았다. 마냥 헤벌쭉 웃는 표정을 보니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였다.


집돌이 남편과 밖순이 아내로서 우리의 성향은 변함없었다. 연애 때 미처 몰랐던 다른 점을 발견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바뀐 건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고요해진 일상이었다. 부부가 된 이후 티키타카를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격려하고, 사랑으로 보듬어줘야 했다.

대화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늘 웃음이 터지는 재미난 대화만 나눌 순 없다. 관점이 다르더라도 경청하고, 지루하더라도 집중해야 한다. 더욱이 미래를 함께하는 부부라면 포기가 아닌 노력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와중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여보세요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해'. 


티키타카가 안되면 어떠하리. 그의 다정함에 이렇게 마음이 녹는데. 우리는 가끔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느라 이미 품고 있는 존재의 소중함을 잊곤 한다.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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