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서두르지 않는 속도

못 본 건 다음으로 남겼더니 더 많이 보였다

by 부엄쓰c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번엔 서두르지 않았다. 못 본 건 다음으로 남겼더니 오히려 더 많이 보였다. 창밖으로 저녁빛이 얇게 눕는 활주로에서 나는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를 천천히 덮었다. 이륙은 예정보다 50분 늦었고, 그 늦음이 오히려 내 마음의 속도를 낮추며 떠난 이유를 또렷하게 비춰주었다.


900_20250808_201807.jpg 2025년 8월 8일 이륙 전, 노을 속에서 잠시 멈춰 숨 고르기. @부엄쓰c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한 콜로세움은 거대한 욕망의 극장이었다. 벽을 따라 겹겹이 쌓인 함성과 선택들, 오래 버틴 인간의 욕망. 같은 날 만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 욕망을 잠잠히 가라앉히는 고요였다. 상처가 사람을 더 깊게 만든다는 말을, 대리석이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욕망과 고요가 한날 한곳에 머물던 순간, 나는 오래 기억될 장면을 품었다.


아이는 매 순간 놀랐다. 낯선 돌바닥, 물맛, 하늘색까지 모두 질문이 됐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니, 여행은 거창한 체크리스트보다 ‘처음 보는 마음’을 지키는 일에 더 가까웠다.


이번엔 이동을 줄이고, 쉼을 넉넉히 두었다. 줄을 서도 화내지 않았고, 못 보면 다음으로 남겼다. 이상하게도 비워두니 더 많이 보였다. 가진 것보다 지켜낼 속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떠날 때의 긴장은 사라지고, 내 안에 조용한 빈칸이 생겼다. 갈 때는 ‘해야 할 것들’이 캐리어를 무겁게 했고, 올 때는 ‘놓아둔 것들’이 마음을 가볍게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쉼이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폴더별로 나눠 담았다. 바르셀로나의 골목과 로마의 돌기둥 사이를 걷는 아이와 내가, 사진 속에서는 꿈의 온도로 빛났다. 화면을 넘길수록 실감은 흐려지고, 그곳의 냄새와 바람은 더 선명해졌다. 몸은 한국인데, 마음은 아직 저녁빛 활주로에 앉아 있는 듯했다.


현실은 묵직하게 돌아왔다. 첫날 저녁, 위경련이 찾아와 등을 구부리게 했다. 아마 여행의 피로나 ‘돌아왔다’는 사실이 어깨 위에 제자리를 찾은 듯 얹힌 탓일 것이다.


그래서 바로, 버리기부터 했다. 냉장고를 비우고 다시 채웠다. 오래된 것들을 덜어내자 안쪽 벽이 보였다. 세탁기를 두 번 돌리고, 마른 옷을 접으며 옷장도 비웠다. 주방의 기름때를 문지르고, 욕실의 스테인리스 선반을 반짝반짝 닦았다. 닦을수록 손끝이 맑아졌다. 여행이 마음의 먼지를 털어냈다면, 청소는 현실의 무게를 고르게 나누는 일이었다.


어제는 병원에 갔다 와서 푹 쉬기로 했다. 그러다 미뤄왔던 눈 검진을 받고, 난시로 흐려 보이던 시야를 위해 더 가벼운 프레임의 안경을 새로 맞췄다. 안경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좋은 원단의 브라우스 두 벌과 바지 한 벌을 골랐다. 나를 위해, 오랜만에 느껴보는 작은 여유였다. 아이도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집에서 자다 깼는데, 티브이만 보는 대신 주어진 숙제를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다. 나는 그게 큰 변화라고 생각했다. 이전과 아주 다르진 않지만, 서로를 여유롭게 바라본 시간과 추억이 마음에 남아 우리를 단단하게 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내 안에 조금의 틈이 생겼음을, 그 틈이 나를 숨 쉬게 한다는 걸 실감했다.


오늘은 첫 출근 아침이다. 해야 할 일들은 많다. 그래도 모든 일에 한 칸씩 여백을 두기로 한다. 대답은 한 박자 늦게, 포옹은 먼저, 하늘은 잠깐이라도 올려다보며. 여행이 끝나도 들고 다니려던 그 세 가지를, 나는 출근 가방 맨 위에 올려 담는다.


못 본 건 다음으로 남겨도 괜찮다. 남긴 것이 나를 가볍게 한다는 걸 알았으니. 오늘도 나는 그 속도로, 내 삶을 걸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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