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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가족?

(나의 퇴사기 그 네 번째 이야기, 왜 어려울 때만 가족일까?)


고통분담


어려울 때만 가족입니다.


한 때 유행했던 그룹의 CF 카피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족 별 셋"


네. 회사를 다닐 때 

우리는 **맨, $$인, ##족이라 스스로 혹은 다른 구성원을 칭하며

소속감과 연대감을 갖도록 노력하고 또 기업문화 조직에서도 그러길 독려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회사 CI, BI가 새겨진 벳지를 재킷에 달고, 

자랑스러운 회사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어떤 이는 이를 개줄이라고 칭하는 이도 있지만)

작은 소모임(학습조직, 회식)과 워크숍을 통해 '가족애'를 뽐냅니다.

실제 제가 다녔던 세 곳의 기업 역시 그러했고, 

저 역시 그 속의 한 구성원, 

어떨 땐 내가 소위 말하는 이너써클(Inner Circle)이라 착각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가족이면 가족이 힘들 때, 기운 빠질 때, 아플 때, 지칠 때,

배려해 주고 보살펴 주고 해야 그게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바로, 회사에서 등이 떠밀려 나오기까지 2년여 동안은 

아 가족이란 존재가 등을 돌리면 모두가 나에게 돌을 던지는 밖에 있는 '남 보다'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나가야 할 사람이면, 더 이상 관심과 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는,

잘 풀릴 때, 그 사람의 효용가치가 있을 때만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았던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미리 알았다면,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서 설마 나는 그런 버림받는 가족에 해당되지는

않을 줄 알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했습니다. 


퇴사를 결정하기 전 


어쩔 수 없는 따돌림과 반복되는 퇴사 압력에 마지못해 사직서에 사인을 하게 되는 그 순간

들었던 말이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귀에 맴돕니다.


제가 하는 일에 비해 회사 사정도 좋지 않은데 너무 많은 급여를 받고 있다고,

어렵기 때문에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고. 


저 보다 늦게 회사에서 합류한 '인사팀장'입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형식적인 멘트였고, 그 사람(인사팀장)도 그 사람 본연의

일을 하는 것뿐이었는데 왜 그때는 그 말이나 나를 대하는 회사의 태도가 서운하게 느껴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회사라는 곳에 제가 은연중 많이 기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 뜻에 따라 고통분담을 하게 된 지금,

본의 아니게 독립을 하여 지금은 진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처음 몇 달은 아들 녀석 공부를 봐주면서 육아에도 전념을 해 보고, 

낮 시간에 '백수'처럼 밀린 TV와 서점에 가서 책도 보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한 5, 6개월 지내고 나니 아내가 '운동'과 '글쓰기'를 권유하더군요


사실 코로나 핑계로 10년 가까이 매일 했던 운동을 쉬었던 터라 몸이 근질했었고, 

글은 제가 꼭 소소한 내용이라도 써보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습니다.


마침 기회다 싶어, 

다시 시작을 하고 지금은 회사원이 아닌, 다른 일을 생각하고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겪는 중입니다. 


회사 안에서 가만히 있어도 월급을 받았던(그러고 보니 오늘 21일이 급여일이네요) 

그때가 많이 그립기도 하지만, 


지금 남들보다 먼저 겪는 이 시행착오가 언젠가 제 사업, 제 자산의 제국의 큰 양분이 될 것을 믿으며


집 식구가 아닌, 진짜 가족처럼 일할 수 있는 파트너들을 찾을 때까지 열심히 길을 걸어 보려고 합니다.



나의 직장생활 이야기.


퇴사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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