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치레몬 Mar 28. 2021

삶과 죽음, 사람과 물건 사이

미니멀 라이프의 시작


2015년 가을의 어느 날. 아직 늦여름의 더운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서서히 한낮의 열기는 덜해지고, 어쩐지 하늘은 조금씩 푸르고 높아지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9월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밖에서 점심을 먹자며 팀 동료들과 함께 직장 근처에 있는 떡볶이집을 다녀왔다. 다시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던 오후, 갑자기 걸려온 엄마의 전화 한 통으로 지극히 평범했던 그 날은 평생 잊지 못할 하루가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술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 늘 걱정이긴 했지만, 특별히 아픈 곳 없이 건강하셨는데, 마지막 만났을 때는 너무나 활기차 보이셨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상사에게 보고를 하고 - 그때까지만 해도 갑작스러운 현실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 착오일 수 있다는 희망 섞인 바람이 있었다 - 급하게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필요한 일을 하나씩 시작하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것은 사실이었다.






여자의 물욕은 다 때가 있다고 했던가. 화장품, 옷과 구두와 같은 장신구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살림을 하면 어느 정도 아이들을 키워 놓고 그릇과 모피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였다. 더 나중에는 금붙이, 보석과 같은 가치가 있는 장신구를 찾다가, 맨 끝에는 집이나 땅 같은 본격적인(!) 자산을 찾는다고 들었다.



당시의 나는 그릇을 사서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결혼할 때 장만하여 십 년 이상 사용한 오래된 그릇들이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블로그용으로 사진을 찍으면 음식을 담은 사진들이 영 예뻐 보이지 않는 것이 뭔가 못마땅했다.



생활비에서 약간의 여유가 있을 듯하거나 이번 달에 특별히 쇼핑을 한 게 없다 싶으면, 새 그릇을 서너 개씩 사서 모았다. 해외 직구에 재미를 붙여 외국 사이트에서 직접 그릇을 사곤 했다. 어떤 그릇을 살까 고민하며 온라인으로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아빠가 돌아가셨던 그 날, 집에 돌아왔는데 마침 얼마 전에 주문했던 영국제 새 접시들이 도착해 있었다. 택배를 열어볼 의욕이 전혀 없었던 나는 도착한 택배를 상자째 그대로 주방 베란다에 내어 놓았다.



곧 분주한 장례 절차가 이어졌다. 손님들이 계속 이어지고, 집에서 장례식장을 왔다 갔다 하기가 애매해 발인 전날에는 손님이 가신 다음에 장례식장 한 구석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버지를 납골당에 모시고, 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충격을 받으셨을 엄마를 생각해 친정에 잠시 있다가 며칠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아빠가 계시지 않는데 세상은 하루하루 변함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마흔 가까이 나이를 먹었으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세상 이치였지만, 막상 처음으로 직접 당해 보니(?) 괜히 뭔가 야속하고 서운했다.



식탁 앞에 멍하니 앉아 집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며칠 동안 집을 비웠더니 어딘가 모르게 어지럽고 헝클어진 것 같았다. 집안의 공기 또한 평소와 다르게 무겁고 어색하면서도 산만했다.



그러다 나의 시선은 곧 주방 베란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택배 상자를 향했다. 그새 주문했던 그릇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기에, 이 택배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상자를 열어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새 그릇이 없어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새 그릇이 있거나 없거나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는 사람은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 이후로 어쩐지 그릇에 대한 물욕은 사라졌다. 이미 많은 그릇을 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상태에서 물건을 더 늘이지 말자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강하게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인생을 관통할만한 엄청난 교훈을 깨닫게 되었는데, 바로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자'이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건강한 몸으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는 것에 감사하고, 나를 떠올려 연락을 주는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서서히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나갔다.



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었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라 생각해 버는 대로 쓰고 살았지만 그때부터 달라지기로 결심하였다. 자본주의 세상에 사는 이상 좀 더 노력해 부를 쌓아 최소한 돈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겪지 말 것이며, 지금처럼 나의 대부분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하는 직장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자유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바꿔보려 노력한 결과 지금은 정신적인 안정과 균형을 찾게 되었다.






당시 한참 동안 열을 올려 장만했던 그릇들은 지금도 아주 잘 쓰고 있다. 신혼 때 세트로 장만했으나 쓰지 않던 그릇들은 대부분 정리를 하였기에, 이제 새 그릇들은 익숙한 헌 살림이 되었다.



결혼 준비할 때 엄마가 사주셨던 커피잔 세트와 내가 직접 산 북유럽 그릇



여러모로 잘 쓰고 있는 큰 플레이트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쓰는 빈도가 잦아지는 그릇이 바로 면기이다. 유일하게 면기는 새로 장만하지 않고 신혼 시절 세트 구성 그대로를 쓰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 이상하게 면기가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면기가 꼭 필요한 것인가? 왜 갑자기 그릇이 눈에 들어오지? 얼마 만에 생긴 그릇에 대한 관심일까? 생각해 보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면기가 꼭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무조건 새 면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긴 하다. 오랫동안 그릇을 사지 않았고 그저 잊고 있었다. 이제는 그릇에 대한 생각, 소비 심리, 그리고 아빠를 생각하면 마음 저리게 연상되는 황망한 이별의 시간을 담담하게 쓸 수 있게 됐다.



아빠가 떠나신 지 5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빠를 떠올리는 일은 아픔과 고통이라기보다는 그리움과 감사가 되었다. 아직 본격적인 면기 쇼핑에 나선 것은 아니나 마음에 드는 면기가 나타나면 즐거운 마음으로 장만할 수 있을 것 같다.



https://brunch.co.kr/@richlemon/11



        

매거진의 이전글 재택근무가 주는 작은 위안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