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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레몬 Dec 30. 2020

백년해로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

연애+결혼 20년 차의 단상



엄마와 아빠가 출근한 주중, 이제 학교도 학원도 가지 않는 아이들은 오롯이 둘이 함께 집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낮에는 당연히(?) 늘 비슷한 점심을 먹는다. 냉장고에 있던 밥과 반찬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것. 음식 투정이 심하지는 않지만, 올해 코로나로 계속되는 반복적인 일상 그리고 밥상에(ㅋㅋㅋ) 아이들이 제법 물려하는 것 같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이다. 집에 나와 아이 둘이 함께 있던 날이었고, 점심을 준비하던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재택을 하게 된 날이었는데, 남매는 세 가지 음식 중 하나를 해달라고 조른다. 그 세 가지란, delicious thing/ yummy thing/ tasty thing...... 늘 먹던 밥과 반찬만 주면 도저히 불만이 가라앉지 않을 기세라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는 파스타를 하기로 했다.



끓는 물에 면을 삶으며 재료를 볶고 이제 마지막으로 소스를 투하해 몇 분 끓이면 될 차례였는데, 냉장고에 있던 로제 소스병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다시 돌려 보고, 타월을 잡았다가, 급하게 스마트폰을 검색해서 '뚜껑 여는 법'을 찾아 이것저것 다 시도해 보았다. 아이들도 돌아가며 로제 소스병을 열어보고, 별별 방법을 다 써봤는데 결국은 열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는 평소 오일 소스 파스타를 더 즐겨먹는다는 것. 물론 그날의 재료에는 로제 소스가 더 어울리긴 했지만 ㅜ.ㅜ 병뚜껑 열기를 포기하고 우리는 순순히(?) 오일 파스타를 먹었다.



셋이서 먹은 오일 파스타. 맛, 맛있었다... 라고 생각해 본다. ㅎㅎㅎㅎ



"다음엔 아빠가 집에 계실 때 소스 넣어서 해 먹자"라고,

엄마는 뚜껑을 열 힘과 요령이 없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면서.






일주일이 지났다. 다시 재택근무하는 날. 카페인 생명수(?)를 제공해주는 캡슐커피 머신이 고장으로 원정 수리를 위해 대기 중이었다.



노트북을 켜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미리 남편이 다량으로 준비해 놓은 액상커피 한 병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별생각 없이 뚜껑을 여는데 어라? 또 열리지 않는다. ㅜ.ㅜ



여러 병이 있었기에 바꿔서 해 본다. 주방 행주를 잡고서도 돌려 본다. 4병을 트라이한 후에야 간신히 병뚜껑을 열 수 있었다......



평소 하체보다 상체 근력과 힘이 부족하고, 특히 손 힘이 약한 탓이 클 것이다. 타고나길 힘이 없는데 게으르기까지 해서 운동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또 말하면 뭣하리.



문제의 그 커피 (TMI: 라벨이 없어 분리수거에 매우 간편한 커피이다 -_-)






연애 4년에 결혼 16년, 남편과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20년. 이제 남편은 나의 부모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고, 성격과 취향은 물론 순간의 심리 상태 파악까지 거의 90%에 가까운 적중률(?)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절을 보내며, 사랑도 미움도 갈등도, 웃음도 한숨도 한바탕 어우러진 시기는 언제나 존재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오래전부터 각자의 베프가 서로이기에 수다도 놀이도 술친구도 함께 하고, 각자의 시간 또한 편하게 보내고 있다.



한 사람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오래 지속하는 것에 더하여, 서로의 유전자를 함께 나누고 믹스한 2세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부부만이 공유할 수 있는 신기하고 특별한 경험이다.



백년해로라는 말은 일견 낯간지럽고 비현실적인 어감이 존재한다. 나는 그저 중년을 맞이한, 배우자를 알고 지낸 것이 20년이 된 사람으로서 비교적 합이 잘 맞는 우리의 결혼 생활이 소탈하고 무난하게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아이들이 다 커서 각자의 삶을 꾸리기 위해 독립한 다음에도,

평생 병뚜껑을 열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은 결코 아니다.



이 또한 분명 사랑일 것이다.

ㅎㅎㅎㅎㅎㅎㅎ



https://brunch.co.kr/@richlem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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