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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현 Jun 10. 2023

달콤, 씁쓸한

에스프레소를 모르고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참회

 며칠 전 잠시 부산에 방문했을 때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닷바람에 날아오는 빗방울을 피해 카페를 찾고 있었다. 프랜차이즈 카페와 곰탕집 사이로 수많은 위스키 병이 멋들어지게 장식된 카페가 눈에 띄었다. 장식장 앞으론 고급스럽게 보이는 에스프레소 머신과 테라스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외국인 여성들의 모습은 내 마음속 유럽에 대한 사대주의를 꿈틀거리기에 충분했다. 낮시간대에는 커피와 음료를 팔고 저녁시간대에는 위스키를 판매하는 곳에서, 대표적인 ‘얼죽아’인 아내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할 것으로 생각하고 색다른 음료를 마셔볼까 메뉴를 유심히 보던 나는 무척이나 놀라 갑작스러운 아내의 변칙적인 행동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메뉴 선정에 대해 심층 질문을 이어갔다. 이 정도로 인테리어가 각 잡혀 있는 카페라면 이탈리아 여행에 앞서 에스프레소를 예습하기에 좋아 보였다는 것이 답변의 요지였다. 카페의 겉모습만 보고 이탈리아 정통 에스프레소를 맛볼 것으로 생각하는 아내 앞에서 마음속으로만 코웃음을 치곤 곧 쓰디쓴 액체를 맛보고 일그러질 표정을 보며 어떻게 웃음을 참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주문한 에스프레소는 티스푼과 초코바가 얹어져 있는 에스프레소와 탄산수 한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푼으로 열 번 이상 저어 설탕을 녹여 마신 후 탄산수로 입가심을 하라는 바리스타의 가이드도 따랐다. 그리고 그 가이드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따른 아내는 에스프레소의 참맛을 발견했다며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메뉴 선정부터 평가까지 내 예상을 완벽하게 빗겨나갔다.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 나의 오른손은 잽싸게 에스프레소 잔을 낚아채며 눈물만큼 남은 에스프레소의 맛을 보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어 먹기 시작했다.


 처음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 믹스커피는 아저씨의 느낌이 강했다. 과차장 직급 이상의 남성은 대부분 믹스커피를 즐겨 마셨고 과장 진급을 앞두고 사측에 친화적인 성향의 대리 직급 선배들도 믹스커피를 즐겨 마셨다. 믹스커피 파의 공통점 중 하나는 흡연과도 강한 연결고리를 보여주었는데, 탕비실에서 믹스커피 한잔을 제조하여 옥상으로 오르는 흡연자 집단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반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원급이나 젊은 직원들과 유대감을 갖기를 원하는 선배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회사에 있는 커피 자판기에도 달지 않은 아메리카노가 있기도 했지만 점심시간에 주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곤 했다. 믹스커피 그룹은 커피 브랜드별 선호도로 갑론을박이 있었고 카페 파는 산미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곤 했다. 뭐가 됐든 서로 간의 신경전은 묘하게 있었는데, 상호 간에 커피맛도 모르는 집단으로 매도하곤 했다. 그 프림 덩어리를 뭐 하러 먹는지, 그 쓰기만 한 것을 뭐 하러 먹는지.


 이스탄불에서 하파즈무스타파라는 아주 오래된 카페를 방문했다. 조선 철종 시절쯤에 만들어진 카페인데 터키쉬딜라이트와 커피를 주문했다. 늘 먹던 대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싶지만 그런 메뉴는 없으므로 블랙으로 한잔 달라고 했다. 점원은 여러 차례 정말로 no sugar냐고 물었고 난 단 게 싫으니 그냥 블랙으로 달라고 했다. 결과는 사약 그 자체. 함께 주문한 터키쉬 딜라이트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너무 쓰고 강렬한 카페인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스탄불에서 방문했던 하파즈 무스타파. 오른쪽의 커피를 끝내 모두 마시지 못했다. 한국인의 긍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생각해 보면 인도나 태국 여행에서도 차이나 커피도 달달하게 마셨다. 그 당도가 믹스커피에 못지않았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는 이상한 강박에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커피를 달게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바리스타의 역할을 에스프레소와 물의 배합을 하는 정도의 역할로만 한정 지었다. 며칠 전의 에스프레소처럼 완성도가 높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원두 생산지, 유통과정, 로스팅 등에서 부터 달콤한 맛을 어느 제품으로 어느 정도로 배합해야 할지 복잡한 방정식이 필요하다.


 에스프레소와 믹스커피는 궤를 같이 하는 음료로 느껴진다. 다만 그 커피의 향과 농도, 그리고 달콤한 맛의 품질 차이가 확연하게 있고 그 차리를 벌리면 벌릴수록 훌륭한 바리스타의 손을 거친 카페의 음료일터. 조만간 방문하는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를 실컷 마셔보며 ‘달콤 씁쓸한 맛’에 흠뻑 취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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