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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현 Jan 25. 2023

넌 모르잖아, 알록달록한 세상

회색빛 건물과 담벼락으로 이어진 길을 걷는다. 골목이라고 하기엔 넓은 길에 사람도, 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가로수는커녕 화단조차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 아래 건조함이 느껴진다. 선명한 횡단보도 앞에 서서 길 건너 신호등의 아랫 불이 켜지길 기다린다. 어떤 중년 남성이 다가와 내게 말한다. “넌 경찰이 될 수 없어.”


건강검진일은 묘한 기분을 준다. 지난번 검진 때보다 안 좋아진 상태나 어떤 질병을 조기에 진단하고 빠르게 파악하여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보다는 무엇을 끊고 무엇을 줄이라고 할 공식적인 잔소리 결과를 맞이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업무를 중단하며 마치 연차를 사용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도 함께 준다. 학창 시절에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나마 수업을 중단하며 소풍 같은 기분을 주었다. 키가 작은 편이어서 건강에 대한 걱정보단 키가 몇이나 컸을지에 대한 설렘과 걱정 정도 남았다. 특히 초등학교 때는 지난해보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관건이었기 때문에 신체검사를 통해 받을 피드백은 기대를 충족하느냐, 기대에 못미춰 아쉽냐 정도다. 초등학교 4학년, 만 9세에 진행한 신체검사는 다른 분위기로 흘러갔다.


다른 검사처럼 빠르게 하나씩 해치워 나가며 옆에 붙어 있는 친구들과 까불다가 조용히 하라는 선생님의 불호령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 와중에 어떤 선생님이 책 몇 권을 들고 오며 선생님 자리에 앉고선 번호 순서대로 줄을 세웠다. 무슨 검사인진 몰라도 숫자를 몇 번 얘기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내 기억엔 아마 그날이 생애 첫 색약 검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책을 펼치며 원 안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읽어보라고 했고 하나씩 읽어 나갔다. 한, 두장이 넘어가자 갑자기 알파벳이 나타났다. 알파벳 [S]와 [O]가 보였다. ‘이건 SO 라고 쓰여있는 건가? 분명 다들 숫자를 읽었는데 왜 갑자기 알파벳이 나오지?’ 영어 한마디 못하던 소년이 느닷없는 알파벳 등장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잠시 머뭇거리자 지쳐있던 선생님은 짜증이 솟구쳤다. 빨리 읽으라고 재촉하는 선생님의 짜증에 입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몇 장을 더 넘겼다. 이번엔 아무런 알파벳도 보이지 않았고 숫자도 보이지 않았다. 내겐 그저 녹색의 조그마한 동그라미로 가득한 원형만 보였다. “왜 안 읽어? 안 보여? 옆에 서 있어.” 마치 벌을 서듯 선생님 옆에 서서 멀뚱멀뚱 있었다. 몇몇 친한 친구들이 지나가며 ‘넌 왜 거기 서있냐’, ‘나도 몰라’ 하는 눈빛과 표정의 대화만 오갔다. 서서 들어보니 아무도 영어 알파벳을 말하지 않았다. ‘아! 그건 숫자 50이었구나. 내가 잘못 본 거구나. 다시 하면 제대로 숫자로 말해줘야지.’ 모든 학생이 자리에 앉고 홀로 선생님 앞에 서서 다시 검진을 시작했다. 이번엔 뒤쪽 페이지 였다. “읽어봐.” 녹색의 동그라미, 적색의 동그라미로 가득 찬 몇몇 페이지를 보며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짜증이 한츰 수그러든 선생님의 처방은 ‘안과를 가라’였다. 내 눈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어떤 경로였는지 몰라도 그 사실은 어머니께 빠르게 전달되었다. 적녹색 색약일 가능성이 있으며 정확한 것은 안과에 가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빠르게 주변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취득하였다. 적녹색 색약이라는 게 녹색과 적색이 섞여 있을 때 구분을 못한다는데 그럼 적색을 녹색으로 바라보거나 녹색을 적색으로 바라본다는 것인지, 질병은 아닐 것 같은데 고칠 수 있는 여부 등 모든 게 모호했다. 무엇보다 직업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이었다. 예시로 나온 직업은 경찰이나 공군 정도였지만 공무원 중 이 정도일 테니 민간기업도 취업에 제한을 줄 수 있다는 걱정이 집안을 휩쓸었다. 대신 학교에서 진행한 색약 검사지를 통한 검사가 틀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좋은 소식보단 좋지 못한 소식과 루머로 가득 찼다.


안과에서 전문의가 일러준 96년도 버전의 적녹색 색약은 이랬다.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고 운전면허증 취득에도 문제없다. 군대도 간다. 적색 계통의 색과 녹색 계통의 색이 섞여 있을 때 명확히 구분을 못하는 정도다. 우리나라 남성의 5% 정도는 적녹색 색약이고 유전적인 요소다. 안경이 있긴 하지만 고가이고 크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가장 걱정했던 요소가 이어서 나왔다. 혹시 자녀를 미대나 경찰대, 사관학교 보낼 계획이 있느냐, 없다면 상관없다. 크레파스 색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나를 돈 들여 가르친 미술 교육의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혼내셨던 어머니는 당연히 날 미대로 보낼 생각이 없으셨다. 경찰대나 사관학교에 갈 수준의 재능이 보이질 않으니 이 또한 생각해 보신 적 없으셨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어릴 때부터 성룡을 통해 영화를 배운 성룡 키즈이다 보니 마음속 직업 3순위 안에는 항상 경찰이 있었다. 폴리스스토리 시리즈가 워낙 유명하기도 하지만 굳이 그 시리즈가 아니어도 성룡은 대부분 현대물에 형사로 나오다 보니 경찰의 멋스러움이 항상 머문 영향이다. 아무튼 그날은 나 홀로 TOP3 희망진로 중 하나를 지운 날이 되었다.


안과 선생님이 말해준 대로 특정 직업에 대한 꿈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녹색 색약의 불편함은 특별히 없다. 이마저도 최근에는 안경을 쓰고 검사를 통과할 수 있는 제도나 방법도 생긴 것으로 보인다. 직업 외에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불편한 점조차 우성인자를 갖고 있는 타인의 설명을 들어야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붉은색과 누런빛의 조화로 아름답다고 알려진 단풍인데, 단풍을 바라보며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과 내가 느끼는 감정의 차이가 색약에서 기인되었다는 사실은 한참이 지나고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내 취향이 아닐 줄 알았지 다르게 보인다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녹색과 붉은색이 뭉개져 보이는 모습이 아마도 알록달록하게 보이나 보다.


적녹색 색약임을 알게 된 후로 가장 불편해진 부분은 성인이 되기 전 초중고교에서 매해 치른 신체검사였다. 색약 검진 할 때마다 선생님이나 담당자에게 적녹색 색약임을 말씀드리고 자리에 바로 앉는 모습은 밝고 활기찬 학우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너는 왜 숫자를 말하지 않고 바로 앉는지, 무슨 대화를 한 건지 확인 후 볼펜 몇 자루를 갖고 와서 신나게 테스트를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색이게? 이건 무슨 색이야?” “색약은 그런 게 아니야.” “그래? 그럼 이건 무슨 색인데?” 무지성 색깔 테스트를 몇 해 겪고 나서 나름의 요령이 생겨 아주 다른 답변을 하기 시작하니 질문자들이 시시하게 여겼다. 이를테면 검은색 펜을 들고 왔을 때 노란색이라고 한다고나 파란색 펜에는 하얀색이라고 한다고 하는 식인데 몇몇 무서운 학우들에겐 좋은 태도가 아니었을 테니 마치 시비 거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의 고등학생 전재준(송병근 분)은 색약으로 시비가 생긴 학우를 죽어라 두들겨 팼지만 그런 전투력과 폭력성이 없는 나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14년도 터키 여행을 앞두고 적녹색 색약 안경을 알아본 적이 있었다. 안경원에 가서 물어보니 정품은 약 천만 원 정도 한다고 했다. 18년 전에 비해 반값으로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가의 물품이었다. 대신 정품이 아닌 사제가 있는데 약 백만 원 정도라고 하며 테스트를 권유받았다. 한쪽 렌즈는 녹색, 한쪽 렌즈는 적색으로 되어 있는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보며 이건 못 사겠다 싶지만 호기심이 앞서서 테스트로 써보고 색약 검사지를 보니 안 보이던 숫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신기해서 일상을 다르게 경험해보고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경원 안에서는 새로울 게 없었다. 대신 통창 너머 가로수가 보였다. 녹색빛만 있든 가로수가 촘촘하게 구분된 잎사귀들의 집합체로 느껴졌다. 하나로 뭉뚱그려진 가로수가 너무 많은 정보로 가득 채워져 보였다. 어지러움마저 느껴질 정도여서 얼른 벗어버렸다. 테스트 안경을 너무 오래 쓰다가는 백만 원을 지불하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서 서둘러 벗긴 했지만 새로운 정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애초에 흑백으로 보던 세상이 아니어서 큰 차이가 없을 줄 알았던 사실이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의 자연경관이 하도 멋있다고 해서 알아본 안경이었는데 카파도키아 지역은 대체로 흙빛이어서 적녹색을 크게 구분하지 않아도 경이로움을 느끼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아마도..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가 화제를 모으며 전재준(박성훈 분)의 캐릭터 주요 설정에 적녹색 색약이 들어가 있는 점은 여러모로 반갑게 느껴졌다. 빌런 역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서사 요소로 까지 느껴졌는데 이는 비슷한 유전적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일반적으로 외조부가 색약일 경우 색약 보인자인 어머니를 통해 아들 자녀에게 발현되는 색약이 딸인 하예솔(오지율 분)에게 유전되기 위해서는 어머니인 박연진(임지연 분)도 색약 보인자여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박연진(임지연 분)의 아버지(임예솔의 외조부)도 색약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점이 <더 글로리>의 흐름에 주요 요소가 되진 않을 것 같다.


안과에서 적녹색 색약을 판정받은 날, 꿈에서 어떤 남성이 횡단보도 앞에 선 내게 경찰이 될 수 없다고 일러 주었다. 그 흑백 세상의 꿈은 내가 처음으로 인지한 유전적 결함에 대한 두려움을 그렸던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사는데 지장이 없고 색약으로 인한 좌절도 겪지 않았다. 만화가 이현세도 색약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린 시절 독특한 색을 칠한 그림을 본 미술선생님이 현대미술을 이끌어갈 천재라고 생각해서 미술 쪽을 오히려 권했다는 우화에 어머니는 어린 내가 이상한 색으로 칠한 그림을 보고 혼낸 사실에 대해 아직도 후회 중이시다. 색약을 인지한 지 횟수로 약 30년이 흘렀다. 결함이 있으면 있는 대로 흘러가듯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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