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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Feb 26. 2024

ep.7 집으로 가는 길, 둘째 날 마무리

이곳저곳 스쳐 지나가기

#사진을 클릭하면 커져요!
#그리고 다시 누르면 작아져요!



지금 시각은 6시.

시계가 시침과 분침을 일자로 쫙 펴며 스트레칭하는 시간.

혹은 이 카페의 마감시간.

한국의 카페에 비하면 엄청나게 일찍 문을 닫는 편이다.

그런 스토어 스트리트 에스프레소의 마감시간 덕분에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상당히 애매한 시간.

그렇다고 바로 집으로 가기에는 조금 아쉽다.


그래도 미리 정해둔 다음 스케줄이 없었기에 우선 집으로 가는 경로를 먼저 검색했다.

삐리삐립...

순식간에 경로를 계산한 구글맵.

그것에 따르면 인근 '러셀 스퀘어 가든' 옆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마감하는 카페를 뒤로 하고 정류장을 목표로 발걸음을 떼었다.


지나가는 길에 대학교가 보였다.

'유니버시티 오브 런던', 런던 대학교라고 부를 수 있겠다.

유니버시티 오브 런던이란 런던 내의 대학교와 연구소의 집합체라고 한다.

학교 이름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위치도 런던의 중심부인만큼 연합 내에서 꽤나 먹어주는 학교가 아닐까?

도서관 건물 앞에 독특한 설치물이 있다. 평소에는 벤치, 이벤트가 있으면 객석으로 변신하려나?


그런데 이게 웬걸?

구글맵을 유심히 보다 보니 러셀 스퀘어로 가는 지름길을 하나 개발할 수 있었다.

학교를 따라 블럭을 빙 둘러가는 대신 이 도서관 건물을 통과하면 우주의 웜홀처럼 블럭을 가로지를 수가 있었다.

나도 이곳의 학생들처럼 자연스럽게 걸어서 통과했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바로 메소드 연기이다.

그 순간만큼은 이 학교 학생이 되어버리는 것.

내부에는 열람실을 출입하는 학생들이 몇 있었다.

덩치 좋은 시큐리티 아저씨는 로비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 둘러보니 일반인들도 일일이용권을 구매하면 출입가능한 모양.

아쉽게도 나는 이용할 일이 없겠지.

너무 두리번거리면 조금 이상해 보일까 해서 이만 움직이기로 했다.

역시나 건물을 통과하니 바로 목적지, 러셀 스퀘어가 보였다.

눈앞의 그곳으로 향했다.


지도상으로나 체감상으로나 러셀 스퀘어는 근방에서 나름 큰 편의 녹지이자 공원인 것 같았다.

시간도 늦지 않았겠다 여기를 외면하고 바로 정류장으로 가기는 조금 아쉬워 잠깐 둘러보기로 했다.


대담한 애정행각의 비둘기 커플
4월의 런던은 푸르러지고 있었다.
벤치에 박혀있는 명패들. 시나 소설에서 발췌된 것들일까, 실제 주민들의 이야기일까?


러셀 스퀘어 가든의 널찍한 공간에는 이미 런던 주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곁을 한 바퀴 돌며 런던의 정취를 약간 들이키고는 이만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공원을 나와 정류장 건너편 길에 도달했을 때 눈앞에서 떠나가는 내 버스를 볼 수 있었다.


흠, 어쩐다?

길을 건너 버스가 떠난 정류장의 버스 현황판을 보았다.

여기서 버스를 기다리기에는 차가 방금 떠나간 덕분에 다음 것은 10분 후에나 온다.

그렇다면 조금 더 걸어봐?


머리가 팽팽 돌아가 순식간에 대체 플랜이 세워졌다.

이대로 남쪽으로 걸어서 여러 노선의 버스들이 다니는 템즈강 근처까지 간 다음에 버스를 타기로 했다.

정류장도 많고 버스도 많은 그곳이라면 여러 버스 노선 중에 하나를 골라 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목적지까지 걸어야 하는 거리가 짧지 않기에 오늘도 이미 혹사당한 두 다리와 발에게 물었다.

니들 괜찮니?

피곤하지만 참을만해요.

그래, 뭐 어쩌겠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 나는 보통 엄청 걷는다.

걸으면 신체적으로 힘에 부치는 순간도 오지만 부상이 있지 않는 이상은 참을 수 있다.

걸어라.

그러면 걸어야만 할 수 있는 경험들을 할 수 있게 된다.

피로와 쉬고 싶은 마음을 인내하면 잊지 못할 경험이라는 열매가 마음에 남게 된다.

지하철, 택시, 버스 등 대중교통이나 렌트카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만남들.

이것이 나의 여행이다.


물론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에는 이렇게 다닐 수 없다.

남에게도 이런 강행군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경로를 확인하고 걸음을 떼었다.

이제 목표 정류장까지 나의 시선으로 함께 런던을 걸어보자.


일반적인 역들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의 '러셀 스퀘어' 튜브역. 삼청동의 한옥으로 된 블루보틀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되려나.
경찰서 건물. 현대적이고 듬직하다.
헬스장


한참을 걸어가다가 'LHW', The leading hotels of the world의 명판을 보고 멈췄다.

세계 럭셔리 호텔들의 연합인 LHW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LHW의 심사를 거쳐야만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는 '신라호텔'과 '시그니엘'만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포브스 5 스타와 LHW, 모두를 섭렵한 신라호텔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망고빙수를 먹으러 간 적이 한 번 있을 뿐 아직 제대로 숙박해 본 경험은 없다.

언젠가 경험해 볼 수 있기를.


호텔의 이름은 'L'oscar london'.

얼떨결에 방문한 팬 퍼시픽 호텔에 이어 이 호텔 로비도 잠깐 구경하기로 했다.

옛날 양식의 건물이라 그런지 1층 로비는 현대적인 호텔보다는 매우 비좁았다.

그래도 어두운 내부와 그에 걸맞은 장식으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입구와 복도에 직원은 없었다.

직원뿐만 아니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LHW 명판, 잠실에 놀러 간다면 롯데타워 1층에서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멋진 입구. 밤이면 멋진 쇼가 열릴 것 같다.
내부가 상당히 어두웠다. 놀랍게도 계단 중간의 장식이다.
보라색의 포인트 컬러로 완성된 인테리어


어두운 호텔을 나와 다시 밝은 세상으로 돌아왔다.

발걸음을 옮겼다.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모여있는 구간을 지났는데 거기서 익숙한 친구들이 보였다.

맥도날드, 버거킹, 스타벅스...

친숙함에 어딘가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친김에 잠깐 들어가서 빅맥지수를 확인하기로 했다.

아직 런던 물가가 한국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감이 확실히 잡히지 않았으니 영점 세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빅맥지수를 확인한 김에 옆집에도 들러 와퍼지수까지 확인했다.


빅맥세트에 6.39 파운드, 한화 약 1만 원
와퍼세트에 8.49 파운드, 한화 약 1.4 만 원
보너스로 넣어본 카페 네로의 메뉴판


버스를 타야 하는 'Aldwych' 근처에 도착했다.

옆에 힐튼의 유명한 월도프 호텔이 있었다.

바로 옆에는 뮤지컬 '맘마미아'의 극장이 있었는데, 이곳이 뮤지컬 극장가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런던의 브로드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혹은 런던의 대학로 정도로?




런던의 대학로를 뒤로 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진이 빠진 다리가 버스 좌석에 앉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토한다.

이제 집으로 간다...!


런던의 국립극장?
그리고 그 옆의 아름다운 가게


다리를 건너 강남으로 들어선 버스는 어느새 눈에 익은 길을 따라 나의 동네, 나의 집, 뉴 크로스에 도착했다.

방금까지 머물렀던 런던 중심의 거리와 180도 다른, 거무튀튀한 벽들과 바닥의 오물들.

이제 조금 정겹기도 한 풍경이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내가 저녁을 구매하러 방문한 치킨집의 유리문 한 구석이 깨진 채로 방치된 어떤 험악함을 보고 이곳에 들었던 정을 조금은 떼어내기로 했다.

박스밀 메뉴판과 파손된 유리문

오늘 저녁에는 첫날 눈여겨본 피자집과 치킨집 중에서 이번에는 치킨집에 도전하기로 했다.

'Perfect Fried Chicken'이라는 상호.

인테리어나 메뉴판을 보면 나름의 규격과 시스템이 있는 것이 하나의 작은 프랜차이즈 가게로 보이는데, 이후 런던을(정확히는 이런 느낌의 거주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비슷한 이름과 메뉴의 프랜차이즈 가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동네마다 있는 김밥천국이랄까.

김밥천국, 김밥마을, 김밥나라 등등 비슷한 메뉴와 간판의 가게들이 여기서는 패스트푸드 식당으로 둔갑하여 해당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좌우로 열리는 두 유리문 중 하나가 대차게 파손되어 있었는데, 가게는 이에 아랑곳 않고 문을 활짝 연 채로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환영을 하니 들어갈 수밖에.


매장 내부의 메뉴판은 가게 유리에 붙어있던 포스터들과 다른 메뉴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고 온 것은 밖의 메뉴들이라 조금은 당황했다.

가게 내부 이리저리를 열심히 살폈지만 내가 점찍어둔 메뉴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주문은 가능했는데, 점원에게 밖에서 본 박스밀 1번을 주문하겠다고 하니 만사 오케이였다.


내가 주문한 박스밀의 구성은 상당히 푸짐해서 소식가에 가까운 내 기준 조금 과식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

그래도 과감히 주문하기로 결정했다.

혹여 결정에 이유가 필요하다면 '기분 좋은 날이어서'라고 하자.


주문을 마치고 방실방실 웃고 있으니(좋은 인상과 좋은 분위기를 풍기면 호의가 따라온다는 것이 내 지론이자 인생을 사는 방식이다), 주문을 받은 파란색 앞치마와 조리모(아마 파란색이 프랜차이즈의 대표색인 듯했다)를 쓴 흑인 남자직원이 감자튀김을 위한 소스를 고르라고 말했다.

런던이 처음인 나는 살짝 당황.

여기 뭐가 있는 줄 알고 골라?

메뉴판에 가게가 제공하는 소스 종류들이 적혀있거나, 혹은 소스통들이 친절하게 손님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놓여있지 않아서 어떤 옵션들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에게 어떤 것들이 있냐고 묻게 되었다.

축구선수 박지성 선수의 옛 동료 '패트리스 에브라'를 닮은 그.

나의 질문에 그는 굉장히 빠르게 소스들을 읊었는데, 말의 속도도 빠르고 영어 듣기 시험의 성우로는 아마 취직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그의 독특한 발음이 나의 빈약한 영어 듣기 능력과 만나 시너지를 일으켰다.

한마디로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는 말이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쏟아지는 소스 이름들 속에서도 익숙해서 캐치할 수 있었던 케첩과 마요네즈를 필두로 한 소스들이 한 5, 6개 정도는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난감했다.

그가 말했으니 이제 내가 말해야 하는 차례.

그가 원하는 답을 해줘야 하는데...!

그가 속 시원할 수 있게 원하는 걸 딱 집어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내 귀를 스쳐 지나간 신원미상의 소스들 뿐.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기 전에 당황하지 않고 그에게 추천을 요청했다.

잘 모를 때는 가게의 추천메뉴를 고르면 중간은 간다.

그러나 직원은 약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내가 뭘 잘못했나?

여기 사람들은 가게의 추천을 안 받나?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나 인종차별?!

그래도 다행히 그의 말투는 모호한 표정과 다르게 껄껄껄 웃음이 섞여 있었고 다시 추천 소스들을 선별해 읊어주었다.

그렇게 다시 두 번째 듣기 찬스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2, 3개의 소스 이름들이 들려왔다.

영어 오픽 시험에서는 문제마다 두 번씩 지문을 들을 수가 있다.

오픽 시험을 치다 첫 번째 듣기에서 문제를 다 이해 못 한 사람의 심정으로 내 모든 청각을 그에게 집중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듣기 평가 결과도 대차게 실패.

난감함에 내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래도 다시 한번 당황을 멈추고 그에게 부탁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 부탁이었다.

음... 그 소스들 다 주세요!

다 먹어보고 싶어요!


그러자 그는 더 크게 껄껄껄 웃었다.

얼굴도 조금 묘한 표정에서 확실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검은 그의 손은 희뿌연 플라스틱 소스통들을 차례로 들어 푸짐하게 포장용기에 짜내었다.


나머지 음식들이 조리되기를 기다리며 그에게 파손된 가게 문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지난주에 어떤 미친놈이 돌을 던져 유리를 깨트린 모양.

돌을 던지자마자 달아나서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새삼 내가 어떤 동네에 있는 건지 잘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했다.

고픈 배는 짐정리보다 어서 음식부터 먹으라고 요구했지만, 나는 어른스럽게 짐정리를 마치고 식사를 시작했다.

내게 어른스러움이란 술을 만취해 집에 돌아오더라도 옷 정리와 세수, 양치는 꼭 하고 잠자리에 드는 종류의 것이다.

여러분도 이런 종류의 어른스러움이 없다면 길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런 자제력을 기르면 저녁을 적지 않게 먹은 날 밤에 찾아오는 야식충동 등을 참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오늘의 메뉴는 매우 매우 매우 만족스러웠다.

건강에는 어떨지 몰라도 포만감과 미각에는 상당한 고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구성은 치킨버거 1, 닭튀김 덩어리 1, 치킨윙 3, 감자튀김.

역시나 배가 매우 불렀다.



이로써 좋은 하루였다.


내가 선택한 박스밀 1번, 음료 없이 7 파운드다. 한화 약 1.1 만 원
저 소스들의 잡탕 아래에 치킨들이 들어있다.




ep.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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