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메로(1)에 이어서...
약 17년 전, 차메로는 고향인 쿠바가 아니라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신경과 체격이 좋았던 차메로는 일찍이 마을의 인기 스포츠였던 야구를 시작했다. 동네에서 야구 좀 하는 꼬마로 이름 날리던 그의 존재가 야구 전문 코치의 귀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그는 차메로의 재능이 더 큰 무대인 미국에서도 충분히 꽃 피울 정도라 판단했고, 그의 설득으로 차메로는 MLB 입성을 목표로 한 아메리칸드림을 품에 안고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쿠바 혁명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탓에 제3국을 통해 한참을 돌아가야 했지만, 성공의 꿈을 가진 그들에게는 꺼릴 일이 없었다. 쿠바 출신의 선배들도 다 했던 일이니까. 그들이 모든 절차를 마쳐 도착한 곳은 여러 지역 중에서 멕시코와 국경이 가까운 곳을 찾아간 곳이 애리조나주였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고향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우니까.
미국으로 건너간 젊은 재능 차메로는 그의 잠재력을 싹 틔우며 유망한 야구선수로 차근차근 성장했다. 그는 감독의 총애를 받는 유망주였다. 어린 나이부터 시간당 99마일의 속력을 가진 구위를 뿌려대는 핫볼러를 마다할 감독은 없었다.
능력을 갖춘 자 주변에는 기회와 호의가 늘 따르기 마련이었고, 차메로는 주변의 도움으로 연고 없는 이방인이 살기 힘든 피닉스의 한 마을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앞마당과 뒤뜰이 있고, 개인 차고와 2층이 있는 집. 전형적인 미국식 주택들이 천에 프린트된 도트무늬처럼 빼곡히 들어찬 마을이었다. 당시 중산층들이나 감당할 수 있었던 그 마을의 부동산 물가 상황 때문에 그는 마을의 유일한 쿠바출신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그곳에서 정진을 처음 만났다. 정진은 그의 집 맞은편에 살고 있는 이웃이었다. 훈련이 없는 날 오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차메로는 맞은편의 집 차고 앞에 설치된 임시 농구대에서 혼자서 열심히 농구를 연습하고 있는 정진을 발견했다. 마침 정진이 쏜 3점 슛은 림에 날카로운 각도로 충돌했고, 거리가 먼 3점 슛인 만큼 힘이 잔뜩 들어간 농구공은 높은 반발력으로 뒤로 거세게 퉁겨져 나왔다.
"으엇!"
어린 정진의 키를 훌쩍 넘어 도로로 튀어 나간 농구공은 공교롭게도 차메로의 마당으로 튀어 들어왔다. 차메로는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고 생각했다. 저 동양인 꼬마에게 삼류 스포츠인 농구보다 진정한 남자의 스포츠인 야구의 아름다운 멋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농구공을 집어 들고 야구 피칭 자세를 취했다. 도로를 건너오려던 정진이 자리에 멈춰 서서 그의 행위를 바라보았다.
"잘 봐라 꼬마야!"
자신의 장기인 포심 직구를 던질 때처럼 허리와 어깨를 회전시키며 일 발 장전시켰다. 그리고 한 호흡 멈춘 뒤 길 건너편 꼬마의 농구대를 향해 전력투구했다.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간 농구공은 거짓말처럼 안쪽 림을 먼저 맞고 그대로 그물로 빨려 들어갔다.
실은 차메로 자신도 놀랐다.
아니, 이게 왜 들어가지?
대충 자신의 어깨 힘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렇게 멋진 장면이 연출될 줄이야! 눈앞의 입이 떡 벌어진 꼬마 때문에 억지로 놀란 티를 감추며 길을 건너갔다. 모든 것을 의도했다는 느낌으로. 걸음은 한껏 느긋하게(마침 차메로에게 달려오는 차가 없어서 다행히도 품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꼬마는 차메로가 길을 건너오자 박수를 ‘짝짝짝’ 치기 시작했다. 차메로는 그런 꼬마가 상당히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그 시절의 차메로는 뒷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꼬마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꼬마는 처음 보는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달려와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와, 어떻게 한 거예요?"
꼬마의 신난 물음에 차메로는 한껏 거만하게 대답했다.
"이게 바로 야구란 거야."
그렇게 그 둘의 친분은 시작되었다. 종종 그는 자신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정진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었다. 사실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캐치볼을 하며 노는 것일 뿐이었지만 이 아이와 놀고 있으면 경쟁에 찌들어진 자신에게도 동심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꼬마네 아버지의 직업이 군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유 없이 조금은 주춤했지만, 뭐 경찰이 아닌 게 어디야? 같은 유색인종들끼리 힘을 합치는 거지.
그러나 그의 순탄한 미국 생활은 계속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어느 날 감독이 머리를 식히라며 보여준 베이브 루스 다큐멘터리로부터 시작되었다. 투타 겸업으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들어선 베이브 루스의 이야기를 보는 순간부터 그는 차메로의 영웅이자 우상이 되어버렸다. 머리를 식히려고 본 영상이 차메로의 열정을 더욱 끓게 만든 것이다.
그는 그날부터 타자의 영역까지 욕심을 뻗쳤다. 방에는 베이브 루스의 포스터를 잔뜩 붙이고, 틈만 나면 붕붕 무언가를 휘두르며 스윙 연습을 했다. 제2의 베이브 루스, 전설의 재림! 차메로 마르티네즈!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그날은 본격적인 성인 프로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거포를 꿈꾸며 무거운 중량 추가 매달린 배트를 스윙하던 차메로는 한 번의 스윙에서 기이한 소리를 들었다.
붕!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배트의 소리뿐만 아니라.
뚝!
자기 몸 안에서 들리는 이질적인 소리. 그리고 뒤이은 허리의 통증.
으아아아악!
그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자신의 비명.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구급차에 실려 간 그는 검사 후에 의사로부터 끔찍한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허리의 부상이 심각하다고. 허리뿐만 아니라 이제껏 강속구를 뿌려대느라 부담이 컸던 오른쪽 어깨도 이제까지 힘이 작용하던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의 부담을 준 스윙 연습이 독이 되어 망가졌다고.
병실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던 감독도 그 소식을 듣고는 망연자실해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퇴원할 정도로 회복한 그는 병원을 나왔지만 야구계에서도 은퇴해야 했다.
그의 삶은 망가졌다. 야구와 함께 끊겨버린 주변의 지원에 그가 지금 사는 집의 렌트비를 감당하기란 불가능했다. 관리되지 않은 집기들은 망가져 갔고 차메로 스스로의 몸 상태도 망가져 갔다.
몸도 몸이지만, 겉으로 보이지 않는 속은 더 망가진 상태였다. 부동산에서 퇴거 명령이 떨어졌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 아메리칸드림이 이렇게 끝난다고? 말도 안 돼. 뭐라도 건져서 돌아가야 해.
제정신 아닌 그에게 어떻게 알고 왔는지 가끔 어울렸던 질 나쁜 친구가 찾아왔다. 맷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어떻게 미국까지 흘러들어왔는지도 모를 녀석이었다.
아마도 밀입국일 확률이 높겠지. 중앙정보국은 이런 놈 하나 못 잡고 뭘 하는 거야?
처음에 차메로는 그를 경계했지만 힘든 시기에 피해자의 정신을 파고드는 사이비종교처럼 맷은 차메로를 쉽게 물들였다.
'곧 떠날 거라며? 떠나기 전에 한탕하고 가야지, 차메로.'
악마의 속삭임. 그리고 차메로는 맷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빈집털이 강도가 되었다. 전형적인 불한당인 맷은 차메로가 잘 알고 있는 이 마을을 타깃으로 삼았다. 범죄율이 낮은 이 동네야말로 타깃으로 적격인 곳이었다. 거기다가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실거주민을 끼고 작업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곳 콧대 높은 놈들이 믿고 있던 이웃사촌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을 상상하니 통쾌함이 맷을 감쌌다. 그는 늘 사람이 사람을 배신할 때 짜릿함을 느꼈다.
"딱 세 집만 털고 가는 거야."
그는 차메로를 유혹했다. 차메로는 이미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래, 딱 세 집만 터는 거야.
차메로는 이웃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치밀한 계획으로 빈집을 털 수 있었다. 마을에서 최신식 방범 대처를 안 해둔 주민 몇을 알고 있었다. 집의 어느 부분이 약점인지도 알고 있었다.
절도 기술자 맷은 구식 방범창을 쉽게 뚫어냈다. 차메로는 작업을 마무리한 후 피해자의 텔레비전을 그저 기념으로 부수려는 맷을 말렸다. 그것은 차메로에게 남아있던 최소한의 양심이었을까?
그렇게 그들은 앞선 두 집에서의 작업을 무사히 마쳤다. 차메로의 집은 범죄 아지트가 되었다. 침실에 두꺼운 커튼을 치고 노획품들을 나눴다. 어두워진 방에는 햇빛 하나 들지 않았다. 암막 커튼을 설치해 완전히 틀어막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호기롭고 대담하게 작업을 마치고 난 후였지만, 칠흑 같은 집에만 들어오면 밖에서 누가 이 장면을 볼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 예전의 친절한 이웃이자 성실한 차메로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것을.
이런 그의 고민을 알아챈 맷이 전담 심리상담 의사가 되어 그의 죄책감을 이런저런 핑계로 덮어주었다(맷은 이런 쪽으로의 상담에 있어서는 의대 정신과 출신의 박사 못지않은 실력을 보였다. 그의 범죄동기부여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맷의 정성 어린 케어로 어느새 차메로는 이 모든 노획품들이 정당한 자신의 몫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에 와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이 금품들은 부족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었다. 내가 저들의 집을 모두 불태우는 것도 아니고 약간의 금품만 가져가는 것이니까. 그렇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인생은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마을에 앞의 두 건의 도난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금방 그들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마지막 세 번째 작업에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 연달아 일어난 절도사건. 마을 주민들은 보안을 강화하고 그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 여행계획을 미루었다. 경찰이 이미 용의자들을 마을을 잘 아는 현지인으로 범위를 좁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경찰의 마을 순찰이 강화되었고, 주민들에게도 주변과 이웃의 집을 잘 살피고 수상한 점이 보이면 바로바로 911에 신고하라는 안내가 돌았다.
물론 그런 방법 지침은 그때까지도 죄 없는 마을 주민 중 하나로 여겨지던 차메로에게도 날아왔다. 차메로는 그 안내장을 손에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수사대상을 마을 주민으로 좁힌 경찰이 거주민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부동산들을 탐문하고 다니는 순간, 퇴거 요청을 받은 차메로의 신상이 바로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리라.
퇴거 요청을 받은 쿠바 출신의 히스패닉 거주자, 그리고 앞선 피해자들의 집이 모두 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면? 지금 당장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자신의 집 입구에 들이닥칠 것 같았다.
젠장, 애초에 시작하면 안 되는 일이었어!
뒤늦은 후회가 올라왔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그러나 동시에 붙잡혀 모진 일을 당하는 상상도 떨쳐낼 수 없었다. 냉전이 끝나고 조금 부드러워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지울 수 없는 뿌리는 쿠바였다.
차메로 일당은 조급해졌다. 결국 그들은 계획을 수정하여 마지막 세 번째 작업 일정을 앞당기고 바로 동네를 뜨기로 했다. 계획이 부족한 상태에서 실행되는 만큼 부득이하게 마지막 범죄는 빈집털이가 아닌 강도 사건이 될 확률이 높았다. 빈집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안에 사람이 있더라도 무작정 들이닥칠 수밖에. 첫 번째 침입 때는 크게 망설였던 차메로도 세 번째 차례가 오자 무덤덤하게 범죄를 계획했다.
그의 범죄 전문가 친구가 지목한 집은 그들의 아지트인 차메로의 집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에 재빠르게 범행을 저지르고 아지트로 돌아와 마을을 뜰 수 있는 집. 바로 자신의 건너편 집, 정진의 집이었다. 차메로는 정진의 천진한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로잡았다(이번에도 범죄 정신과 의사 맷의 역할이 컸다. 그는 차메로가 다시금 고민하는 낌새를 보이자 바로 상담 모드에 들어가 꺾이려는 그의 의지를 다잡았다.)
그들은 어차피 돈 많은 아시안 놈들이야. 모든 아시아인은 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집 안 금고에 쌓아 둘 것이 뻔해. 우리가 가져가도 금방 다시 열심히 일해서 모을 거잖아?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저 집만큼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은 없어.
'같은 유색인종끼리 힘을 모아야지'라고 생각했던 차메로는 이미 저 아래에 묻혔고 맷에 의해 가공된 복면을 쓴 도둑 차메로만 남아있었다.
범행 당일. 그들은 밤이 깊어질 때를 기다렸다. 둘은 어쩌면 조금이라도 빛이 있는 시간에 작전을 실행하는 것을 살짝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밤을 기다리는 그들의 호흡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지만 눈빛에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
차메로는 오늘 밤 행동에 지참해갈 아구 방망이를 괜히 쥐었다 놓았다 했다. 그 단단하고 기다란 물체는 그에게 가장 익숙한 도구였다. 내 인생을 모조리 뒤꼬아놓은 녀석이었지만, 오늘 만약의 상황에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겁박할 무기이기도 했다.
밤이 깊어져 마을에 인적이 드물어진 시각이 되었다. 모두가 잠들었을 밤, 그들의 마지막 작전이 시작되었다. 사실 작전이랄 것도 없이 간단했다.
'그들의 집에 침입해 그들을 겁박하여 제압한 후 금품을 갈취한다.'
이렇게 한 줄로 쉽게 함축할 수 있을 정도니까.
차메로는 그의 동료를 거실에 불러 마지막으로 집의 구조를 브리핑했다. 그의 집과 정진의 집이 같은 구조로 지어진 덕분에 내부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침실들의 위치와 귀중품들이 있을 만한 곳들을 숙지했다. 차메로는 거사의 동지에게 또다시 강조했다.
"절대로 저 집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는 마."
맷이 응수했다.
"너나 정체를 들키지 마, 차메로. 두건 잘 쓰고, 목소리 내지 말고. 나야 외지인이니까 그들이 나를 알아볼 일이 없지만 너는 아니잖아?"
차메로는 껄렁한 맷의 태도가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지만 끝까지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놈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마무리도 결국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도로를 건넜다. 이동하는 내내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그는 이 동네를 잘 알았다. 이 시간에 잠들지 않고 이웃을 염탐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살금살금, 그러나 신속하게 정진의 집 벽에 붙었다. 저번처럼 맷이 문의 잠금장치에 붙어 무언가 작업을 시작했다. 잠시 후면 마법처럼 저 문도 열리리라. 차메로는 맷이 어디서 저런 개뼈다귀 같은 기술을 배워왔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다 온 녀석이지?
그는 이 의문을 너무 늦게 가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의 결론보다 맷이 잠금을 풀어버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철컥
맷의 눈이 복면 사이로 거만하게 빛났다.
"봤지?"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잠금을 해제하고 나면 대단한 마법이라도 부린 양 녀석이 늘 하는 대사였다.
닥치고 문이나 열어.
차메로는 생각을 입 밖으로 뱉는 대신에 손가락을 입 앞에 가져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맷이 걸쇠가 풀린 현관문의 손잡이를 그대로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들이 마주한 것은 텅 빈 현관과 거실이 아닌 두 남자아이였다. 하나는 정진이었고, 하나는 정진의 형이었다. 차메로가 정진의 형을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정진이 그에게 종종 형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소년들은 당시 유행하던 포켓몬스터 게임에 푹 빠져있었다(이 두 소년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아이들이 마찬가지였다.) 학교 후나 쉬는 날에 닌텐도 사의 게임보이 머신을 온종일 붙잡고 있어 엄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그날 저녁, 마지막 스테이지를 앞두고 소년들은 엄마가 하루에 제한해 둔 게임 시간을 모두 사용해 버렸다. 게임의 마지막 결말을 도저히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소년들은 대담한 작전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잠든 밤에 몰래 게임보이를 꺼내와서 거실에 'ㄱ'자 꺾인 구조로 붙어있는 기다란 현관 복도에 숨어서 끝판을 깨자는 것이었다. 이 구조 덕분에 부모님이 잠깐 거실로 나올 일이 있더라도 벽체가 그들을 숨겨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형제의 작전 개시시간이 도래했다. 그들은 조심히 거실을 건넜다. 이동하는 내내 주변을 살폈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그들은 이 집안을 잘 알았다. 이 시간에 잠자리에 들지 않고 그들을 감시할 사람은 없었다.
무사히 현관에 안착했다. 보는 사람 없지만 괜히 몸을 한껏 쭈그린 그들은 조용히 게임보이를 켰다. 게임보이의 소리가 음소거가 되어 있지 않아 순간적으로 '삐로롱' 하는 당시 게임기 특유의 저(低) 비트 사운드가 들려 화들짝 놀랐다. 황급히 음량 버튼을 조작해 음소거를 시킨 그들은 게임을 실행시켰다. 다행히 부모님들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캐릭터를 이동시켜 드디어 마지막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치열한 혈투였다. 지금까지 길러온 역량을 모조리 쏟아부어야 했다. 그들이 가진 6개의 포켓몬이 차례로 챔피언의 무자비한 공격에 쓰러지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가장 애정을 담아 키운 이상해 꽃만이 남았다. 승리를 확신한 챔피언이 날린 일격을 기적적으로 버틴 이상해 꽃은 마지막 힘을 쥐어짠 혼신의 공격으로 챔피언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챔피언이 그들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형제는 새로운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명예의 전당에 등록됨과 동시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형제는 기쁨을 주체 못 하고 몰래 게임 중이라는 본분을 잊은 채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때 현관문에서 작게 철컥거리는 철제 소음이 났지만 형제의 박수 소리에 묻혀 알아채지 못했다.
네 쌍의 눈이 마주쳤다. 3초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동생보다 현관문에 가깝게 있었던 정진의 형 정수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택배 아저씨나, 피자 배달부가 아닌 누가 봐도 도둑의 복장을 하고 있는 두 거한들이었다. 그리고 이 늦은 시간에 택배 아저씨나 피자 배달부가 올 리도 없었다.
그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거실에 도달할 수 없었다. 도둑들에게서 더 가까운 곳에 있었던 정수는 동생을 지나쳐 가려다 별안간 픽 쓰러졌다. 정수가 쥐고 있던 게임보이가 튀어져 나가 벽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쓰러진 형을 보고 놀라 입을 틀어막으며 뒤돌아본 정진의 눈에는 정수의 뒤통수에 방망이를 휘두르고 씩씩거리며 서 있는 맷이 보였다.
"아니, 씨발 뭐 하는 거야! 가족들은 건드리지 말라니까!"
차메로가 맷의 어깨를 강하게 밀며 속삭이듯 소리쳤다. 이에 맷도 차메로를 밀치며 속삭였다.
"젠장, 지금 장난해? 이게 애들 장난이야? 내가 좋아서 그랬어? 이 망할 애새끼들이 우리를 봤고, 또 모든 걸 망치려 하는데 어떡하라고!"
"그래도 씨발…"
차메로의 우람한 주먹이 맷의 옷깃 단추가 모두 터져나갈 정도로 그의 멱살을 붙잡았지만 차마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저 두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맷을 노려볼 뿐이었다.
차메로는 정진을 바라봤다. 소년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공포감에 어쩌면 바지에 실례를 했을지도 몰랐다.
인제 어쩌지…
우선 정수의 상반신이 거실에서 보이는 곳에 걸쳐져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발을 잡고 현관 쪽으로 당겨 다시 벽 뒤로 숨기기로 했다. 두 팔을 올려 만세를 한 채 맥없이 쓰러져 있는 소년의 상반신은 그들의 부모에게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년은 다행히 기절만 한 듯 숨은 쉬고 있었다. 차메로가 아직도 꼼짝 못 하는 정진을 지나가 정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정수의 발을 잡으려던 찰나.
탕!
이미 복잡해져 버린 상황과 그들의 머릿속도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졌을 때, 갑자기 총성이 들렸다. 날아온 총알은 차메로가 서 있던 곳 근처의 거실 쪽 벽을 관통하며 구멍이 뚫었다.
젠장! 부모가 깼다!
소년들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거기다 이곳은 총기 사유화가 합법인 미국이었다. 이 집에 총이 없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거기 누구야!"
남성의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
어쩌지?
그때 다시 움직인 건 맷이었다. 그는 역시 범죄 전문가답게 최선의 선택을 누구보다 신속하게 찾아내었다.
"이 꼬맹이를 인질로 잡아야 해."
그는 아무도 몰래 품속에 숨겨온 잭나이프를 꺼냈다.
미친, 저건 또 뭐야!
맷의 손에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칼이 튀어나오자 차메로는 다시금 그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이 미친 새끼야!
맷은 정진의 목에 칼을 대려 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어두운 복도에서도 번뜩이며 소년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다. 차메로는 맷에게 뛰어들었다. 그들의 몸은 쾅 부딪혔고 그 충격에 차메로의 복면이 조금 내려갔다.
아차!
그는 정진을 바라봤다. 그를 알아본 정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탕!
이번에는 맷과 차메로의 얼굴 사이로 다시 한번 총알이 벽에 구멍을 내며 지나가 맞은편 벽에 박혔다. 소리만으로 이 정도 정확성을 보여주는 소년들의 아버지는 명사수가 확실해 보였다.
"씨발…!"
차메로의 방해로 정진을 인질 삼는 데 실패한 맷은 바로 몸을 뒤돌려 열린 현관문 밖으로 탈출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짧고 가벼운 보폭의 전략적 발걸음으로 접근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의 시야에 든다면 고민도 없이 총을 발포하리라.
그때 정진이 차메로를 향해 속삭였다.
"빨리 나가요."
그리고 크게 외쳤다.
"아빠, 저예요! 너무 무서우니 총 쏘지 말아요!"
즉시 거실에서 다가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아직도 벙쪄있던 차메로에게 정진이 이번에는 입 모양으로만 소리쳤다.
'그냥 가요, 차메로!'
차매로는 뭐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둔하지 않았고 소년이 벌어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혹시나 다시 날아들 총알에 대비해 자세를 낮추고 조용히 그의 동료를 따라 나갔다.
그는 재빨리 도로를 건넜다. 총성이 들렸으니 이웃들이 밖을 확인할지도 몰랐다. 아마 그가 정진의 집에서 나와 자기 집으로 건너가는 것이 목격되었을 수도 있었다.
집 문을 부술 듯 뛰어 들어갔다. 안방으로 가보니 맷은 도주 중에 이곳을 거치지 않았는지 장물들과 현금들이 그대로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그것들을 챙겨 가방에 담았다.
계획이 모두 틀어졌다. 조용히 일을 끝낸 뒤 날 밝을 때 당당히 마을을 떠난다는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해.
차메로는 뒷마당으로 집을 나섰다.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정진의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커튼이 쳐진 창 위로 소년이 아버지에게 기대 안겨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어쩐지 소년의 그림자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자가 다시 한번 말하는 것 같았다.
빨리 가요!
총성을 들은 이웃집들에 불들이 하나씩 들어오고 있었다. 차메로는 그대로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3.차메로(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