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메로(1)에 이어서...
17년이 지났다. 그 사건 이후 다사고난한 여정을 거쳐 고향 쿠바로 돌아온 차메로는 하바나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미국에 짧지 않은 기간을 체류했다가 왔다는 사실에 다시 쿠바에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파이로 딱 오해받기 좋은 조건이었으니까. 그래도 어렵사리 통과할 수 있었는데, 보위국은 그가 미국에서 대차게 실패하고 돌아왔다는 점을 인정(人情)으로 참작해 준 것 같았다.
차메로는 다시 태어났다. 그는 미국 생활의 마지막 선물인 장물들을 정리해 그의 부모님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작은 식당을 냈다. 그렇게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의 가게에서 일하던 여직원인 페넬로페와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되는 작고 소중한 경사도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한 올 두 올 빠지기 시작한 머리에 차메로는 아예 머리를 빡빡 밀었다. 한때의 특급 야구 유망주, 차세대 베이브 루스 차메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하바나 한 구석의 호탕한 대머리 술집 아저씨 차메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은 어떻게 알았는지 맷이 찾아와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녀석은 어떻게 쥐새끼마냥 쿠바를 들락날락거릴 수 있는지, 거기다 자신의 근황과 거처를 알게 된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차메로는 흔쾌히 맷의 몫을 계산하여 치렀다. 과거에 좋지 않게 헤어진 사이였지만 돈을 정산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관계는 매우 쉽게 회복되었다.
재회한 둘은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맷은 여전히 미국에 있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확실한 밀입국 루트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골칫거리 친구가 여전히 음지의 일에 아직도 몸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제 차메로 자신과 엮일 일 없는 남의 일이라 생각하니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물어다 주는 별의별 자극적인 얘기들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찾아온 평화로운 그의 두 번째 삶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와 페넬로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이를 바라며 불 같은 사랑을 했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쉬이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지 않았다. 차메로는 아무래도 자신이 과거의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가게를 쉬는 날이었다. 그는 페넬로페와 모처럼의 외식을 하러 나왔다. 만찬의 메뉴로는 그들이 공통으로 사랑하는 메뉴인 피자를 먹기로 했다. 동네에서 입소문 난 피자집에서 만찬을 한창 즐기고 있는데 옆의 술집이 순간 시끄러워졌다. 차메로는 그들이 주문한 페퍼로니 피자를 한 입 뜯어 물고 우물우물 씹으며 무슨 일인가 살펴봤다.
웬 비실한 동양인 남자 하나가 현지인 남성 서너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멱살을 잡혀 밖으로 끌려 나오고 있었는데 한 젊은 여자가 따라 나와 그들을 말리려고 하고 있었다.
호오, 치정문제인가?
서로 같은 생각임을 한 번의 눈빛 교환으로 알아챈 부부는 다정하게 커플 관람 모드에 들어갔다. 동양인 남자에게서 들려오는 것은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였다.
"아니, 나는 진짜 몰랐다니까! 쟤가 분명 남자친구 없다고 했다고!"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현지 남자들이 영어를 통 알아듣는 느낌이 아니자 최대한 간단한 영어 단어단어로 풀어서 외쳤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급한 제스처들도 곁들였다.
"No boyfriend, no boyfriend! She, Said, No, Boyfriend!"
그래도 멱살을 쥔 남자는 흥분의 끈을 놓지 않았다.
*"보이프렌드 뭐 어쩌라고. 남편이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제야 차메로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술집에서 만난 여자. 남자가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없다고 했겠지. 그렇다고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있었지만 남자친구는 없었으니. 그리고 둘이 노닥거리다가 남편 혹은 남편의 친구들에게 발각.
저 친구 고생 좀 하겠네.
상대방의 홈그라운드에서 곤경에 처한 상황은 가볍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스포츠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홈이 주는 이점은 확실한 것이었다.
차메로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외지인을 바라보는데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동양인의 눈은 차메로를 17년 전의 그 현관으로 돌려보냈다.
설마…!
차메로는 테라스석의 난간을 훌쩍 넘어 그들에게 달려갔다.
"갑자기 뭐 해!"
당황한 페넬로페의 외침을 뒤로하고 구경꾼들을 비집고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투박한 두 손을 뻗어 외지인의 얼굴을 붙잡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거한의 습격에 난장판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들 중 하나가 차메로를 알아보고 아는 체했다.
"뭐야, 차메로잖아? 이봐, 차메로, 이 망할 녀석이 글쎄…"
그때 차메로가 외지인을 그들 품에서 꺼내어 와락 껴안았다. 이 놀랄만한 광경에 모두가 경악했다. 페넬로페는 마시던 맥주를 모조리 뿜어내어 남은 피자 조각들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가장 놀란 건 급습 포옹을 당한 외지인이었다.
그는 이 덩치 큰 난입자가 자신을 안아서 번쩍 들어 올릴 때만 하더라도 생긴 것처럼 우락부락한 힘으로 자신을 으스러뜨리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자신의 몸이 멀쩡하자 외지인은 사자에게 잡힌 쥐의 표정으로 말했다.
"누, 누구세요…?"
차메로는 외지인을 페넬로페에게 데려가 소개했다. 그녀는 소개를 듣자마자 차메로가 결혼을 약속한 그날 밤 고해성사하듯 들려준 그의 과거가 떠올랐다.
정진, 그 소년이구나.
오해가 불러온 폭력사태로부터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많이 배고팠던지 그들이 먹다 남은 피자를 허겁지겁 먹었다. ("하바나 피자는 원래 맥주 맛이 좀 나나요?" 정진이 피자를 먹다 말고 물었다. 차메로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답하려 했지만, 영어를 몰라도 눈치껏 알아들은 페넬로페가 그의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22살밖에 안 된 여자애에게 남자친구가 아니라 남편이 있을 줄을 누가 알겠냐고요. 지구 반대편의 대한민국에는 35살에도 결혼 안 하는 여자들이 넘치는 판인데."
정진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차메로의 가게로 자리를 옮겨 회포를 풀었다. 차메로가 살아온 이야기. 페넬로페를 만나 결혼한 이야기. 그 이후의 생활들. 정진이 살아온 이야기.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이야기. 그러다 하바나까지 흘러들어온 이야기.
한 사람이 소년이고, 한 사람이 청년일 때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소년이 청년이 되고 청년이 중년이 되어버린 지금,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보다 오히려 더욱 돈독해짐을 느꼈다.
"우리 형 있잖아요. 그날 기억이 사라졌잖아요."
"맙소사, 그날 머리를 맞은 거 때문에 바보가 됐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녜요, 다행히 그날 밤만 기억을 못 해요. 지금은 미국에서 변호사 하면서 잘 살고 있어요. 여전히 똑똑하죠."
차메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음날이 됐을 때 밤에 몰래 같이 챔피언을 깬 것도 기억 못 했거든요. 게임보이를 켜자마자 왜 엔딩이 나 있는지 바보 같이 물어봤을 때 진짜 웃겼는데."
페넬로페가 흐뭇하게 둘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나 먼저 집에 갈게. 둘이 이야기 더 하고 와."
페넬로페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차메로는 아까부터 속으로 생각하던 것을 말했다. 이 녀석 이야기를 들어보니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상태였다.
뭐 이리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지.
이제는 자신이 소년을 지켜줄 때라고 생각했다. 그가 여기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그의 보호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얘 여기서 머물게 하고 우리가 보살피면 어떨까? 잠은 여기 윗방 하나 치워서 자게 하고. 가게 일 잔뜩 시키면서 용돈벌이나 시키는 거야. 아마 금방 떠날 것 같으니까."
식구가 하나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볍지 않은 사안이었기에 차메로는 그녀의 반응을 짐작할 수 없었다. 말을 꺼내고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 달리 그녀의 대답은 명쾌했다.
*"좋을 대로 해. 일손 늘어나면 우리야 좋지. 대신에 우리 침실에 기어들어 오면 죽여버린다고 전해줘."
그렇게 여기서 차메로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는데…
오랜만에 옛 추억에 빠진 나는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좋았다. 이제 마음이 잘 맞는 말동무만 있으면 딱 맞을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내 자리 근처에 있는 작은 스탠딩 테이블 하나에 젊은 남녀 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여자 둘에 남자 셋이라… 친구들인가?
여자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 넷의 차림새나 인상이 험악하고 우락부락한 것이 상종해서는 영 좋을 것 없는 양아치들 같았다.
뭐야, 자기들이 무슨 갱단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나는 그쪽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우락부락이들 틈에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에 작은 키지만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의 존재에 계속 눈이 갔다. 타이트한 청바지에 몸에 달라붙는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그녀에게 자꾸만 시선이 끌려갔다. 얼굴도 이쁘장한 것이 마치 까무잡잡한 남미 버전의 ‘아만다 사이프리드’ 같았다.
그녀가 아직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는 못한 것 같았다. 어차피 저 곤란해 보이는 무리와 엮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것이 그리 아쉽지 않았지만, 문제는 저 일행의 다른 우락부락한 여자가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키가 170 후반은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에 역시나 앞뒤좌우로 폭발적인 남미 체형을 가진 여자는, 머리를 스킨헤드로 밀었고 눈에는 짙은 스모키 화장에 코에는 진주 한 알이 피어싱으로 박혀 있었다.
꿀꺽
나는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침을 괜히 꼴깍 삼켰다.
경호원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생각이 떠오른 김에 해당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저 우락부락한 무리 속의 혼자만 가녀린 여자가 조금 이질적으로 보이긴 했다. 누가 봐도 주변 커다란 사람들이 저 여자를 지키는 느낌이었다. 꽃의 암술처럼 가운데에 숨겨져 고고한 빛이 나는 여자는 왠지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느낌도 있었다.
흠, 어딘가 돈이 많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경호원 넷 정도는 가볍게 고용할 정도로 말이지.
그런데 문제는 덩치 큰 경호원 여자가 내게 보내고 있는 시선이 경계가 아닌 호기심이나 수줍음에 가까웠다는 점이었다. 저런 호감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여자라면 약간의 수고만으로도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기가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에다 자매에게 바람맞은 외로운 밤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나를 허락할 수는 없었다. 나보다 몸이 큰 여자는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연애철칙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좀…
경험상 저런 눈빛을 꾸준히 보내는 여자들은 시간이 흘러 그들에게 충분한 용기가 충전된다면 얼마 안 가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이런, 역시나 경험에 기반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외모와 달리 생각보다 수줍은 그녀의 말투에 살짝 놀랐다.
"올라! 그런데 나 스페인어 못해."
다행히 그녀는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왔고 그것은 나에게는 곧 탈출구였다. 나는 안타깝다는 듯 대답하며 속으로는 안도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못 한다는 사실은 그녀를 거절할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불가항력인 언어의 장벽 때문에 그녀는 매우 아쉽겠지만 나에게 더 이상의…
"아, 영어를 쓰는구나! 반가워, 혼자 왔어?"
갑자기 그녀는 굉장히 유창한 영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