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아…”
눈을 감은 채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입에서는 불분명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는 신음소리에 가까웠다. 신음이 난다는 것은 통증이 있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몸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내 정신을 깨운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불편함이란 것이 딱딱한 바닥에서 잤다거나 익숙지 못한 잠자리에서 오는 그런 팔자 좋은 불편함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들이 외쳐대는 목숨이 위태하다는 경고의 불편함이었다.
조금 더 몸 상태를 점검했다. 팔다리가 모두 저렸고, 등과 가슴도 뻑뻑했다. 앉은 자세 그대로 의식을 잃었었는지 긴 시간 내 몸무게를 받아낸 엉덩이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이 계속해서 울렁거렸다. 처음에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 느끼는 울렁임이라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내가 있는 이곳이 통째로 위아래로 울렁거리는 중이란 것을 깨달았다.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모아 눈을 떴다. 첫 시야는 굉장히 뿌옜다. 시야를 밝히기 위해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움직이자 목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제서야 몸의 나머지 센서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는 손을 움직여보려 했다. 부분 마취를 한 것 같은 감각이 손목에 돌았다. 그제야 내 상태를 평가할 수 있었다. 나는 바닥부터 천장을 관통하는 어느 배관에 묶인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작은 선실이었다. 주거용 아파트의 팬트리 룸이나 서비스 룸처럼 사용되는 자투리 공간이었다. 매우 비좁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갇혀 있는 상태.
갇혀 있는 것도 억울한데 묶여 있는 꼴이라니.
조금은 풀어진 목 근육으로 고개를 뒤로 젖혀 무엇이 흐르는지 모를 거대한 배관에 머리를 기댔다. 배관과 내 뒤통수의 접촉에 통증이 느껴지며 내 마지막 기억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파라이소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 피습, 비명소리, 혼란, 그리고 쓰러지는 나를 보고 있는 그들의 표정.
젠장, 이게 뭐야! 납치라니! 어릴 적에도 안 당한 납치를 나이 30이 되고 나서 당한다고?
그래도 중요한 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있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조금이라도 상황을 더 파악하기 위해 다시 이 공간을 살폈다. 생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위아래로 넘실거리는 움직임을 통해 지금 이곳이 바다에 떠 있는 배 내부라는 정도를 예측할 수 있었다. 육지에서 그 소동을 일으키고도 그들의 배가 얌전히 항구에 정박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이곳의 위치는 아마 바다 한가운데일 것이다. 고로 내가 자력으로 이곳을 탈출할 가능성은 0이었다. 사실 모든 탈출의 시작은 이 단단한 포박을 푸는 것인데 007 요원도 아닌 내가 그런 마법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다시 묶인 손목을 살폈다. 두 손목이 뱃일용 두꺼운 로프로 한꺼번에 칭칭 묶여 있었는데, 밧줄의 억새디 억샌 느낌이 상당했기에 캡틴 아메리카처럼 슈퍼 솔저 혈청을 맞는다고 해도 쉬이 끊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몸부림 없이 얌전히 기절해 있었던지 손목의 묶인 부분이 약간 따갑기는 해도 마찰흔은 없었다. 군대에서 밧줄 작업을 해본 적이 있었다. 거친 밧줄에 연약한 맨살이 잘못 쓸리면 찰과상이 생기기 쉬웠다.
덜컹
그때 선실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에는 레게머리남이 서 있었다.
"너…!"
반가움도 잠시, 생존본능이 나를 지배했다. 튀어나오려는 반말을 억누르고 공손한 어투로 바꿔 다시 입을 열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나는 그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다. 그래도 같이 한 테이블을 공유했던 사이니 인정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바람이었다. 그는 조용히 깨어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복도에 대고 스페인어로 외쳤다.
*"이 녀석 깨어났어! 아무나 빨리 안토니를 좀 데려와!"
저게 무슨 말이지?
더 이상 친절하게 영어를 써주지 않는 것에서 그에게 걸었던 기대는 바로 철회했다.
그래, 바랄 걸 바라야지.
레게머리 녀석은 파라이소에서도 내게 한 번도 친절하지 않았었다. 녀석은 나를 다시 보더니 문을 쾅하고 다시 닫고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에 닫히는 문 사이로 보였던 녀석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았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혹시 아만다인가? 아만다도 어제 녀석들과 일행이었던 만큼 이 배에 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와 아만다 사이프리드 사이에 통했던 감정들이 진짜라면 이 배에서 그녀가 나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에는 중후한 회색 의상의 나이 지긋한 남성이 서 있었다. 흰머리가 많이 섞여 전체적으로 회색빛을 띠는 머리를 전부 뒤로 넘겨 붙인 남자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감정이 없는 차가운 표정은 마치 나를 분석 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나는 당황했다. 어제 파라이소에서의 일행 외에도 같은 패거리인 인물들이 있다는 말이었다. 정말 그들이 멕시코 제1의 카르텔 모르싸라는 내 가설이 점점 사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그가 문에 조용히 서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할 여유 시간이 생겼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정체를 물어야 하나, 살려달라 해야 하나 고민하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안녕하세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저를 좀 살려주세요."
남자는 내 말이 끝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면 근육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청각에 장애가 있나? 아, 아니면 영어를 못하나?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모르싸가 멕시코 조직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당장 떠오르는 스페인어를 꺼냈다.
"올라."
그는 내 인사를 받자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맞췄다! 역시 영어를 몰랐던 거야!
바로 앞까지 도착한 그는 다짜고짜 내 왼뺨을 후려갈겼다. 목이 오른쪽으로 엄청난 각도로 꺾였다. 순간 앞이 보이지 않고 뇌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흔드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귀 바로 옆에서 터지는 파열음에 청각 신경은 머리에 가득 ‘삐’ 소리를 전달하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그러나 절묘하게 귀를 피해서 가격한 덕분에 이명은 금방 가라앉았다.
“와오.”
강력한 일격에 정신을 추스르는 데에는 10여 초가 필요했다. 입에는 짭짤한 맛이 맴돌았다. 구강 내부의 볼살이 어금니에 씹혀 상처가 났는지 출혈이 발생한 것 같았다.
퉤
입에 고이는 짭짤한 액체를 뱉어보니 역시나 투명한 침에 일부 선홍빛의 혈액이 섞여 있었다.
"일어나."
남자가 영어로 말했다. 남자가 말하는 첫 단어였다.
뭐야, 영어를 하잖아?
배신감에 남자가 원망스러웠지만 남자의 다음 말에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 그렇지 않으면 반대쪽도 맞을 거야."
허겁지겁 다리를 일으켰다. 그러나 오랫동안 혈액순환이 돌지 않았던 다리는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몇 차례 넘어질 뻔했지만 오히려 나를 묶고 있던 배관이 지팡이 역할을 해주어 무사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 나와 비슷해진 눈높이의 상대의 얼굴이 가까웠다. 헛기침이 나왔지만 억지로 안으로 집어삼켰다. 잘못해서 침이라도 튀겼다가는 결국 반대쪽 뺨을 맞을 것 같다는 우려에서였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그의 말은 역시 짧고 간결했으며 싸늘했다. 이미 그의 모든 말을 따를 준비가 된 나는 재빨리 답했다.
"저는…"
그러나 그는 내 잽싼 대답을 더 잽싸게 끊으며 다시 자기가 할 말을 했다.
"아니지, 내 소개부터 하지. 내 이름은 안토니."
아까 레게머리 새끼가 외친 말에서 '안토니'라는 단어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게 이 무서운 사람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자기소개에 내가 잘하면 무사히 배를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허황된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르싸의 고문 전문가지."
잠깐만요, 무슨 전문가라고?
내가 지금 정신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감히 안토니의 고문 실력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봐도 그 분야 권위자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어느 분야를 가져다 대어도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보일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의 경력을 대변해 주는 지긋한 나이, 잘 관리된 외모, 침착한 표정, 어두운 색감의 의상, 그리고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의 말투가 그랬다. 만약 그가 ‘내 이름은 안토니, 모르싸의 병아리 감정 전문가지.’라고 말했어도 나는 그가 병아리의 암수를 기가 막히게 판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나는 최대한 비굴하게,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말했다. 그러나 안토니는 역시 베테랑답게 굴복한 먹잇감을 앞에 두고도 어떠한 방심이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냉정한 대답이었다.
"넌 누구지."
"제 이름은 정진이구요. 어쩌다 하바나에 체류 중인 한국인 여행객입니다."
나는 완전한 복종을 내비쳤다. 강아지로 치면 나는 이미 드러누워 배를 깐 상태였다(꼴사나운 ‘낑낑’ 거리는 소리도 내고 있겠지.) 다행인 점은 내 마음의 표현이 그에게 닿은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내 헌신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무표정하게 노려보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뒷짐을 지고 내 앞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취조를 이어갔다.
"내가 듣기로는 미국에서 살았다고 했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의문을 떠올림과 동시에 어제 파라이소에서 아만다 일당들에게 떠들어댔던 것이 떠올랐다. 열심히 떠벌렸던 내 이야기들이 모조리 마르쏘의 냉혹한 진실 감별사 안토니에게 전해진 것이다.
젠장, 걔들이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줬구나!
집중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제 그들에게 말한 내용과 지금부터 안토니에게 말하는 내용에 다름이 없어야 했다. 상대는 프로였고 그의 직책상 거짓을 찾아내는 것에 도가 텄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기억력도 좋을 것이다. 멍청하면 이 짓도 못해먹지 않을까? 혹시나 어제 아만다 앞에서 거짓 허풍을 부린 것이 있었다면 해명이 매우 곤란해질 것이란 걱정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다 이 찡그린 표정이 안토니의 눈에 그리 순종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더 나아가서는 반항의 의미로 보일까 재빨리 표정을 풀고 눈을 착하게 떴다.
"네, 맞습니다. 아버지의 발령으로 온 가족이 10년 가까이 머물렀죠."
"지역은?"
"애리조나의 피닉스입니다."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깐깐하기 그지없는 상사에게 보고하는 느낌이 이럴 것 같았다. 안토니 부장님은 계속해서 취조를 이어갔다.
"CIA 요원들은 해외 임무 중에 신분 여러 개를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
갑자기 CIA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라니? CIA는 물론이고 경찰과도 잘 엮일 일 없이 살고 있는 내가 이런 취조를 듣게 되자 굉장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급격히 치밀은 억울함이 나도 모르게 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우리 사이에 분명한 오해가 있으니 반드시 풀어야 했다.
"아니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짝!
예상치 못한 황당한 질문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내 대답을 끊는 것은 안토니의 매콤한 손이었다. 그 매서운 무기는 내 얼굴에 또다시 작렬했다. 반응 못할 정도의 번개 같은 손놀림이었다.
우두득
목 관절들이 돌아가며 내는 생생한 소리, 그것과 함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번에도 왼쪽 뺨이었다. 아직 첫 타격의 화끈함이 남아있던 피부가 식기도 전에 다시 뜨거워졌다. 아까 났던 입 안의 상처가 더 벌어져 입에서 피가 왈칵 나왔다.
재차 가해진 가격으로 나는 눈곱만큼 남아있던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평화롭게 살아왔던 내가 이런 가혹한 상황에 부닥친 적이 있을 리가 없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은 적도 없었다. 아마 지금 이후에 조금만 더 강한 무언가가 내게 가해지면 그대로 오줌을 지릴지도 몰랐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한 눈빛으로 안토니를 바라봤다. 안토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파악했어. 너 같은 사람을 상대로라면 나는 별다른 도구 없이 이 맨손만으로도 네가 가진 모든 비밀을 끄집어낼 수 있지. 그리고 네가 가지지 않은 비밀들도 스스로 만들어 내게 할 수 있지. 내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말이야.”
이건 그냥 내가 좆됐다는 뜻이었다. 머리가 깜깜해지며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모든 걸 내려놓은 나는 내 앞에 펼쳐질 지옥을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토니의 다음 말은 모든 희망을 잃은 것과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너에게는 운이 좋게도, 세상이 바뀌었어. 그런 야만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한 사람의 과거 행적들을 들춰내기가 가능해졌지."
귀가 번쩍 뜨이고 동공이 자동으로 확장되었다. 잽싸게 고개를 들어 안토니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여전히 재래의 방식들을 더 선호하지만, 내가 가장 잘하는 분야이기도 하고, 그러나 네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가령 너희 가족들이라던가 말이지…"
피가 섞인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끈적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몸이 예민해져 있었다.
무슨 의도지?
안토니가 일부러 피해자들에게 희망의 실마리를 뿌린 다음 그들이 희망을 확신했을 때 뒤통수를 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라면 이건 확실히 생존의 청신호가 분명했다. 나는 그 청신호를 따라가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묶여서 뺨 맞고 오줌을 지려야 하는 상태의 내게 선택권은 하나뿐이기도 했다.
"네, 무조건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안토니의 신호와 함께 다른 처음 보는 부하가 방으로 들어왔다. 파라이소 멤버가 아닌 또 다른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확실히 말단의 부하로 보이는 그는 나를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손목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는 다음 억압을 위한 한 칸의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부하는 곧바로 같이 챙겨 온 수갑을 내 양 손목을 채웠다.
사실, 이미 그들의 충실한 한 마리 개가 된 내게 굳이 수갑을 채우지 않아도 돌발행동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은 아직 나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렇다고 말로써 이런 내 충심을 표현했다가는 매콤한 세 번째 뺨을 맞을지도 몰랐다.
그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선실이었다. 그곳은 엔진음과 파도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던 처음의 공간보다는 더 조용한 곳이었다. 방은 흡사 사무공간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책상에는 랩톱 한 대와 위성 전화로 보이는 것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라는 거지?
말없이 꿈뻑꿈뻑 자신을 쳐다보는 나에게 안토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위성 전화와 위성을 통해 인터넷이 연결된 랩톱이 있다."
그의 말에 따라 시선이 책상 위의 노트북으로 향했다. 책상 위의 스탠드 조명이 무대 위 피조명처럼 심플한 은빛 디자인의 노트북을 비추고 있었다. 세련된 노트북은 델 사의 것으로 ‘Dell’이라고 쓰인 멋들어진 마크가 노트북의 윗 판에 새겨져 있었다.
“다행히 맥북은 아니네요.”
개인적으로 애플의 맥북을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 최고 수준의 고문 기술자(나는 이미 그를 신격화하고 있었다)에게 대관절 인터넷 창을 어떻게 띄우는지 멍청한 얼굴로 물어보는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안토니는 내 회심의 스몰토크를 무시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제 자네 신분을 검증할 자료들을 우리에게 모조리 꺼내. 자네의 블로그, SNS, 이메일, 클라우드 저장소 등에 저장되어 있는 자네의 일기, 사진, 메일, 성장배경, 경력, 이력서, 계약서, 범죄 이력, 주민등록등본, 혼인 유무 등을 증명해.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지만 허튼 짓은 하지 말아. 내 눈에는 자네가 밖으로 연락할 수단을 줬다고 그런 자살행위를 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아. 그래도 만약을 위해 우리 사람 하나가 자네 뒤에 딱 붙어 감시할 거고 카메라로 모든 과정을 녹화할 거야."
안토니가 박수를 한 번 치자 문이 열리면서 삼각대와 카메라 한 대가 들어왔다. 카메라는 소니의 AX700 모델의 핸디캠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온 사람은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파라이소에서의 묶음 머리 남이었다. 묶음 머리 남이 들어오며 반가운 듯 나에게 윙크를 찡긋 날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저놈도 잔혹한 안토니에게 내 이야기를 일러바친 놈들 중 하나니까.
"자네의 출생부터 현재까지를 한순간의 공백도 없이 증명해야 해. 그럼 시작해."
"네,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이미 안토니의 제일가는 심복이라도 된 것처럼 복명복창했다. 부하들과 카메라가 내 뒤에 자리를 잡았고, 안토니는 문 옆의 작은 의자에 조용히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봤다. 내가 살아나갈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마우스를 쥐고 움직였다.
나는 곧장 내 인스타그램으로 향했다. 대학을 자퇴하기 전까지의 기록 대부분이 이곳에 있었다. 한때 내 인생을 되돌아보자는 취지로 집에서 옛날 필름 카메라로 찍힌 앨범들을 꺼내어 산부인과에서부터 학창 시절까지의 사진들을 연도별로 간추려 올린 적이 있었다. 출생지역은 물론이고, 한국과 미국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의 졸업 앨범 사진도 있었기에 내 성장단계들을 그들에게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메일함에 친구 따라 재미로 써봤던 구직용 이력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메일로 SNS의 사진들과 내가 졸업한 학교들이 일치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도 내 신분이 또 입증될 수가 있다니. 4차 산업혁명을 지나고 있는 21세기의 기술이 새삼 대단하면서도 무서워졌다. 말 그대로 내 인생의 발자취가 웹상에 모두 담겨 있었다.
어쨌든 내 신분이 순탄히 입증이 되어가자 내 손가락도 신이 나서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음엔 뭘 또 보여줘야 하지? 어떤 걸 보여주면 그에게 이쁨 받을 수 있을까?
안토니가 지시하면서 읊었던 자료들의 리스트들을 떠올려봤다. 개중에 주민등록등본이라든지 혼인 유무라든지 이상한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어떤 것이든지 상관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제 대학을 그만두고 외국을 돌아다니던 시절을 입증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공식적인 기록을 가장 찾기 힘든 시기였다. 친구를 통해 번역 의뢰를 받은 메일 기록들, 그리고 번역한 원고들과 출판사로부터 고료를 지불받은 내역들.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찍은 사진들, 만난 여자들과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쿠바에 정착하여 차메로와 함께 하게 된 것들까지. 그들에게 사진과 내 이야기를 총동원해서 모두 전달했다. 남은 것은 그의 판단이었다.
안토니는 내 자료들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포커페이스에 속이 타들어갔지만 그의 판단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최종판결은 '혐의 없음'이었다.
판정을 마치고 그의 작고 소중한 의자로 돌아온 안토니는 멋들어지게 다리를 꼬았다. 이어서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나에 대한 혐의를 풀어서일까 시종일관 강압적인 명령조였던 그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 이제 옆의 위성 전화를 집어 들게. 그리고 자네의 가족들, 자주 연락하는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자네가 새 삶을 살기 위해 원양어업을 하는 배에 올랐다고 말하게. 자네의 방랑병을 고칠 기가 막힌 명약을 찾았는데 그것이 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며 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둘러대. 일종의 수행이자 고행인 것이지. 기간은 일단 5년으로 계약했고 변화의 의지가 굳으니 말리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라고. 그렇게 자네는 온전히 혼자가 되는 거야."
원양어선, 5년의 계약기간, 고립을 자처하는 마지막 메시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름의 개연성을 챙긴 설정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에게 뜬금없이 배를 탄다는 내용은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의심스러운 부분투성인 이야기겠지만, 이야기의 주체가 평범하게 살아오지 않은 나라면 또 말이 되어버리는 설정이었다.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이 실종되었다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나 원양어선 타요, 하핫!' 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수상함을 느껴 신고를 하거나 추궁을 할 테지만, 가족과 연을 끊고 세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일상인 나 같은 사람에게서 똑같은 연락이 온다면 '녀석, 언젠가 이럴 줄 알았지'하며 수긍해 버리고 금세 그들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한 10년이 지난 다음 그들의 술자리에서
'야, 그때 걔 5년 배 타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나? 난 20년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아, 맞다 20년이었어! 이제 한 10년 남았네.'
라는 그날의 한 입 거리 술안주로 반짝하고는 한 잔 술과 함께 목뒤로 넘어가 잊히겠지.
예전에 등을 진 가족들과 그닥 가깝지 않은 나머지 친구들은 충분히 이해시킬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차메로였다. 내가 당일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사라진 것과 차메로의 불 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한 번에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우선 난이도가 낮은 다른 사람들 쪽을 먼저 시작하며 내 글짓기 능력과 상황 전달 능력을 예열하기로 했다.
우선 번역 의뢰를 물어다 주는 친구와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그들 모두 내 예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반응으로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원양어선이라니, 정말 큰 결심 했구나. 그래, 정신 차리고 몸 건강히 돌아와.”) 내심 내 목소리에 담긴 간절함과 절박함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지만, 혹시나 그런 일이 생겼다가는 안토니의 다재다능한 손이 내 배를 산 채로 가르는 것을 라이브로 지켜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제발 그만 죽여달라고 간절하고 절박하게 애원하겠지.
다음은 가족들이었다. 부모님들에 앞서 먼저 연락한 형은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그래, 정신 차리고 나중에 진짜 어른이 돼서 만나자."
"형도 돈 많이 벌어놔."
쓰읍, 왜 다들 똑같은 반응이지?
형보다 조금 더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던 엄마와 아빠도 잘 해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집 식탁에서 함께 식사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스피커폰을 켜두고 두 분께 한꺼번에 통보를 드릴 수 있었다. 정신 차리려 배에 오른다는 내 입선 사유가 그들의 마음을 건드린 것 같았다.
"돈 많이 모아서 효도하러 돌아오겠습니다. 낳아 주시고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답이 없었다.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고, 대표로 아빠가 담담하게 응원을 해주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끝내 전하지 못하고 통화를 끝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 남았어요."
안토니는 대꾸도 안 하고 고개만 끄덕했다. 나는 그의 고갯짓을 실행 명령으로 인식하여 다시 전화기를 잡았다. 익숙한 차메로 전화의 신호음이 들렸다.
"여보세요?"
차메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시간이 24시간이 채 안 지났지만 어마어마한 반가움이 일었다. 오늘 통화한 사람들 중에서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를 이 구렁텅이에서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프로 운동선수 출신에 딱 봐도 기골이 장대하다지만 일반인인 차메로가 자칭(현재까지는) 모르싸라는 이 단체를 뚫고 나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울컥했지만 한 차례 목을 가다듬고 차분히 대답했다.
"차메로 저예요."
"진? 진이야? 너 지금 어디야!"
그에게 지금껏 사용한 대본을 또다시 그대로 읊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런 계획이 있었으면 우리에게 한 달 전이라도 미리 말할 수 있었잖아! 한 달이 아니라 하루 전이라도!"
"미안해요. 갑자기 뭔가 깨달음을 얻어서요."
"깨달음을…? 술집에서…?"
"네, 술집에서요."
"대체 무슨 술을 마셨길래?"
"네? 그게 지금 중요해요?"
"빨리 말해 봐!"
"데, 데낄라요."
차메로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너 어제 파라이소에 간 건 아니지? 어제 파라이소에서 야밤에 난동이 있었다고 온 하바나가 발칵 뒤집어졌어. 그런데 하필 너도 그날 밤부터 안 보이지. 내가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차메로의 말을 듣자 눈물이 핑 돌았다. 복잡한 감정에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소문으로는 그 빌어먹을 모르싸 새끼들이 우리 하바나까지 와서 지들 좆대로 난동을 피웠다는데 말이야."
아니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분들을 자극하는 말씀을 하시면…
나는 급히 중재에 나섰다. 모르싸를 향한 차메로의 욕설에 맞춰 감시역으로 붙은 부하의 눈썹이 꿈틀 하는 것을 포착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분들의, 아니, 모르싸의 짓이 아닐 수 있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날 가게에 있던 사람들만 수십인데! 그런데 모르싸 관련된 소동이라고 경찰들도 그냥 쉬쉬하며 그냥 덮으려는 모양이야. 듣자 하니 뭐 납치 이야기도 있고 그런데 말이지. 다 한 통속이야 더러운 놈들!"
나는 아무래도 이쯤으로 통화를 그만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이 걸걸한 차메로와 굳이 길게 통화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가 모르싸에 대한 어떤 상스러운 말들을 더 할지 몰랐다. 모르고 한 말이라고 해도 그들에게 잘못 찍혔다가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그래도 그 난리통에 차메로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하여튼 저 이제 배를 오래 타다 돌아갈 거거든요."
"오래? 얼마나 오래?"
옆에서 묶음 머리남이 씨익 웃으며 다섯 손가락을 쫙 펴 보였다.
"오, 오 년이요."
차메로는 한숨을 다시 한번 크게 쉬었다.
"그래, 이 녀석아. 몸조심하고, 네 방, 네 물건은 치우지 않으마. 죽을 것 같이 힘들면 선장 붙잡고 계집애처럼 질질 짜든지 구명보트 타고 탈출하든지 해서 언제든 돌아와."
내가 과연 이들의 마수에서 벗어나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그 와중에도 가슴 한 편이 따뜻해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마지막 통화를 끝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음이 이상했다. 이제 나는 세상에서 정말로 붕 뜬 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노예처럼 부려도, 오늘 밤 저녁 재료로 사용해도, 바다에 던져 상어 낚시용 미끼로 사용해도 아무도 모르게 된 것이다.
나는 혼이 나간 눈으로 안토니를 바라봤다. 안토니는 박수를 치더니 말했다.
"고생했네. 이제 데리고 가서 좀 씻기고 멀끔하게 만들어 와."
기합이 들어간 부하들의 대답과 함께 안토니는 먼저 취조실을 나갔다. 그의 말을 듣고 나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묶여서 쥐 났던 부위는 제법 괜찮아졌지만, 머리에서 흐르다 굳은 핏자국과 온통 긴장하며 컴퓨터를 두드리다 흘린 땀들에 몸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안토니가 때린 왼뺨이 그의 손자국 모양으로 붉게 부어오른 느낌이 들었다. 생존본능이 불러온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인해 안토니에게 가지고 있던 경외심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칵, 퉤!
구강 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아 아직도 침에는 약간의 피가 섞여 있었다. 계속해서 입안에 짭짤한 맛이 도는 게, 다음 식사시간까지(만약 밥이 주어진다면)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면 음식 간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새끼가, 더럽게!"
얼굴 모르는 말단 느낌의 부하가 배에 침을 뱉은 내 뒤통수를 쳤다. 묶음 머리남이 그런 부하의 행동을 나무라며 말했다.
"에헤이, 그만해! 자, 너도 고생 많았어. 이만 가 쉬어. 이 친구는 내가 데려가 마무리할게."
말단 부하는 나에게 눈을 한 번 더 부라리고는 사라졌다. 나는 선실을 나가는 녀석의 뒤통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엄청난 중압감의 안토니와는 다르게 어쩐지 기회가 생기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의 녀석이었다.
혹시 몰라서 너 얼굴 기억해 뒀다!
5. 모르싸의…!(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