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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Sep 13. 2024

챕터 4. 모르싸의 카타리나?

4. 모르싸의 카타리나?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우에다 미호? 우에다 유메? 이미 내 머릿속에서 그녀들은 지워져 있었다.

용기를 낸 스킨헤드 여자 경호원이 말의 물꼬를 트는 것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그들은 나에게 다가와 무리를 이루었다. 원래 친구가 되려고 만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빠르게 녹아들었다.

    겉으로 험상궂어 보이던 그룹이었지만 실제로 상대해 보니 굉장히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위험해 보이는 친구들인 스킨헤드녀, 스킨헤드남, 레게머리남, 묶음머리남 사이에 혼자 비교적 왜소한 체형을 가진 남미 아만다 사이프리드도 밝고 통통 튀는 성격이었다. 꺽다리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그녀는 작은 체구에도 오히려 그들 무리의 대장 격으로 보였다. 군계일학이랄까. 우리는 말을 섞으며 금세 어우러졌다.

    아시아인인 나의 눈으로는 겉모습만으로 그들의 출신이 이곳 쿠바인지 아니면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국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인들의 국적을 외양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리라.

    처음 말의 물꼬를 튼 스킨헤드녀 말고도 그들은 모두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는데, 출신을 물어보는 것으로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멕시코 출신의 대학생들로 방학을 맞아 친구들끼리 휴양도시 하바나로 놀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들 영어가 유창했구나."

    "그러면 너는 왜 이렇게 영어를 잘해?"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그냥 뭐, 어릴 적에 아버지 일 때문에 미국에서 짧지 않게 살았었거든."

    "아버지가 뭐 하셨는데?"

    "군인이셨거든."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내 대답에 모두 놀라는 것 같았다. 왜들 그렇게 놀라는 걸까? 군인이라는 직업이 그들 나라에서는 만나기 생소한 직업이거나, 강인함과는 멀어 보이는 내가 전혀 군인의 아들로 보이지 않아서 일지도 몰랐다. 하긴 내가 나를 돌아봐도 나에게서는 군인의 유전자가 보이지 않았다.


    "왜들 그래? 군인 싫어해?"

    "아니 그냥 너에게서 전혀 군인의 느낌이 나지 않았거든."


    후줄근하지만 근육질에 딱 달라붙는 민소매 차림의 묶음머리 남자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라 너는 왠지 군인보다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 같았거든."


    물론 나는 그의 발언에 전혀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지만 황급히 내 심정을 살피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예의범절을 아는 친구구먼.

    조금 전까지 그들을 인격 파탄의 무뢰배들로 보았던 나 자신을 반성하기로 했다. 역시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관련된 유명한 격언으로는 '책 표지로 책 전부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류 보편적인 실수이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오늘은 괜히 더 창피했다.


    "대학생들이면 어떤 전공을 공부하고 있어? 설마 다 같은 과 동기들이야?"


    나는 전문 진행자처럼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아직 대학생들이라는 것을 보니 나보다 나이가 어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마음은 더 편해졌다. 아무래도 나이가 더 많은 나를 불태워 그들이 나로 인해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친구들과 해외여행이라… 내가 대학생일 때의 느낌이 새록새록 나는걸?


    "나는 수의학 전공이야!"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귀엽게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섹시하지만 귀여운 매력도 넘치는 그녀에게 정말 어울리는 전공이라 생각했다. 토끼 같은 그녀가 토끼들을 진찰하는 모습이 그려지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못 믿는 거야?"

    "아냐, 너무 잘 어울려서."


    그때 스킨헤드녀가 우리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어 외쳤다.


    "나도 수의학 전공이야!"


    홀로 파라이소에 있던 내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스킨헤드녀 본인이었지만, 막상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니 보기와 달리 수줍음이 많던 그녀는 말수가 적어 대화에 통 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불쑥 치고 들어오자 나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오, 너도구나! 같은 과 친구들이었구나. 너도 잘 어울려. 너 개구리 해부를 되게 잘할 거 같아."


    내가 던진 짓궂은 농담에 그녀는 다시 쭈글쭈글 움츠러들었고 나머지 친구들은 입을 옴짝달싹하며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친구를 놀리는 말에 과하게 리액션하지 않는 것이 이 모임의 분위기인 것 같았다. 내 고향 친구들 같으면 누구 하나 당하는 농담에는 모두 배를 잡고 웃으며 한 마디씩 동참했을 텐데. 알면 알수록 더욱 건실한 집단의 친구들이었다. 아무리 친구라도 생각 없이 던진 농담에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니까.


    "농담이었어, 너 되게 동물들을 좋아할 것 같아."


    내 수습에 스킨헤드녀는 건장한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조용히 배시시 웃었다. 그 순수한 모습에 순간 저 과격한 스타일링만 아니었더라면 귀엽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과격함의 선봉장인 코뚜레와 그 끝에 달린 진주가 덜덜 떨리는 것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놀랍게도 나머지 남성 친구들은 모두 의학 전공이었다. 엘리트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과격한 이미지와 다르게 모두 올곧게 자라온 청년들인 것에 다시금 놀랐다.

    저들이 몸에 한 문신들을 보면 그런 학구적인 전공이 전혀 매칭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소개를 듣고 나서는 왠지 한 녀석의 옷을 벗기면 등짝에 시험에서 틀린 것이 너무 억울한 나머지 다시 틀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거대한 인체 해부도를 문신으로 새겨 놓았을 것처럼 느껴졌다. 문신은 일종의 해방구로 학창 시절에 공부만 하느라 억압된 욕구를 성인이 됨과 동시에 온몸에다가 폭발적으로 풀어낸 것일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거기다 서양 문화라면 문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덜할 수도 있는 거니까.

    과거에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보았던 비슷한 케이스의 청년들이 떠올랐다. 엇나간 그들 중 대부분은 자유와 의무의 밸런스를 금방 찾아 돌아왔지만, 일부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후자에 속했다.

    내가 인생 선배로서 이들이 벌써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넜을까, 아닐까, 혼자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 때, 영어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우리가 주변의 시선을 끌었는지 바텐더가 구석진 내 자리까지 다가와 굳이 대화에 동참했다. 그러다 곧 바텐더뿐만 아니라 파라이소의 손님들이 점점 우리에게 모여들었다.

    겉으로는 과도하게 잘 놀게 생긴 이 멕시코 학구파 의학도들 덕분인지 우리 테이블이 굉장히 함께 놀아보고 싶은 이미지로 보인 것 같았다.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이 건실한 모범생 청년들을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고 있었지만, 나조차도 처음에 그들을 그렇게 판단해 버렸기에 뭐라 할 자격은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자연스럽게 이곳은 스테이지로 바뀌어 댄스 타임에 돌입했다. 다들 기분 좋게 취해 음악에 몸을 맡겼다.

    나는 이 미어터지려는 인파 속에서도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떨어지지 않으려 딱 붙어있었다. 그녀가 오늘 밤 외로운 나를 구원해 주리라. 다행히 그녀도 내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키가 모두 나보다 컸기 때문에 그녀만이 나와 적절한 비율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나름의 핑곗거리도 있었다.

    그녀와 시끄러운 와중에 귀에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다. 그녀도 내 농담들에 깔깔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와 좀 더 가까이 붙어서 분위기를 잡고 싶었던 내게 하나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스킨헤드녀도 우리 둘과 떨어지지 않고 옆에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내 눈앞의 아만다에게만 집중하기에는 같은 일행인 그녀를 너무 방치한다는 느낌이 들어 종종 스킨헤드녀에게도 말을 걸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험상궂은 만면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부조화스러운 광경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귀엽기도 했다. 갓 성인이 된 사촌동생(투포환을 전공하는)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그녀에게서는 연애를 한 번도 못 한 풋풋한 느낌이 났다.

    아아, 청춘이구나.


    춤판인 분위기가 조금 차분해지고, 다시 가게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되었다. 바 옆에 있는 조금 넓은 테이블로 옮긴 우리 일행은 맥주를 한 병씩 쥐고는 이야기를 나눴다.

    아까의 열정적인 분위기는 가라앉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이 오늘 파라이소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라도 한 듯 우리 인근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자기들끼리 대화한다거나 우리 테이블 옆에 서서 우리들 이야기를 경청하거나 한 마디씩 끼어드는 모습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꺼낸 화제가 곧 파라이소 전체로 퍼졌다.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 모르싸가 이곳 하바나에 찾아왔다는 이야기였다. 모르싸라면 전혀 무관한 나조차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의 대형 카르텔이었다.


    "모르싸라니… 정말 무섭다, 그렇지?"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은 나는 내 맞은편의 아만다 사이프리드에게 물었다. 아만다도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쳤다.


    "그러니까 말이야. 너 모르싸가 어떤 덴 줄은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금은 알지. 멕시코에서, 아니 이 대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카르텔이잖아."


    모르싸는 중미의 나라들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위상을 떨치고 있는 조직이었다. 외지인인 나도 알 정도면 대부분은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차메로에게 언젠가 들은 이야기였는데, 6년 전부터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더니 결국 멕시코 카르텔 세계를 모두 잡아먹은 전대미문의 조직이라고 했었다.

    그들의 다른 카르텔을 흡수, 합병하는 방식이 굉장히 잔인하다고 알려졌는데, 상대 조직의 보스를 생포해 공개적으로 해부를 해버리는 인간 해체 쇼를 진행하는 것으로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를 이용한다고 했다.


    '인체의 신비전이라니. 어휴, 아주 상종도 못 할 놈들이잖아요?'


    내 대답에 차메로도 깊게 공감했었다. 평화롭게 사는, 또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라 얼마나 그들이 대단한지 살결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게 나에게 익숙한 동북아의 이야기로 치환시켜 중국의 삼합회나 일본의 야쿠자 같은 느낌으로 이해하면 되겠다고 스스로 정리를 해두었었다.


    "거기다 내가 들은 바로는 모르싸는 적들의 배를 산채로 가른다던데? 바로 이렇게."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아만다의 배를 명치부터 하복부 위까지 천천히 그어 내리며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피부를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간지럽다는 듯 반응하더니 묘한 미소를 남기고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만다가 일어나니 방금의 짧지만 끈적한 무드는 친구들 앞에서 보이기 조금 민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자리를 뜨고 나자 나와 건장한 친구들만 어색하게 자리에 남았다. 뭐랄까, 어색해도 너무 어색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이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빨리 눈을 굴려 바의 냉장고를 확인해 코로나 맥주병이 다 떨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스킨헤드녀에게 말했다.


    "맥주 더 마실래? 여기 코로나 세 병 더 주세요!"


    바텐더는 내 주문에 냉장고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아이고, 코로나가 떨어져서 백 룸에서 가져와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나는 바텐더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아, 그럼 제가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가지고 올게요."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스킨헤드녀에게 여유롭게 한 번씩 웃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 룸은 화장실 바로 옆에 있었다. 어렵지 않게 코로나 맥주 박스를 찾았다. 이래 보여도 나도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세 병을 꺼내 들고는 백 룸 입구에 기대어 서서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깐의 기다림 후에 그녀가 볼일을 보고 나왔다. 나는 맥주를 들지 않은 빈 쪽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백 룸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거리가 매우 가까워진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여기에서 뭐 해?"


    나는 맥주를 들어 보이고는 대답하며 옆의 빈 상자에 맥주들을 잠깐 올려두었다.


    "맥주 가지러 왔지."

    "맥주만?"


    그녀가 나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르고 더욱 다가갔다.


    "글쎄. 다른 건 뭐가 있나 지금 좀 살펴볼게."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자연스레 입을 맞췄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더욱 진한 입맞춤. 나와 그녀의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그대로 그녀를 좀 더 밀어붙였다. 마침 백 룸에 먼지 쌓인 화장대 같은 것이 그녀 뒤편에 있는 것을 보고는 그쪽으로 인도했다. 그녀도 순순히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그녀의 엉덩이가 화장대에 닿았다. 나는 그녀를 화장대에 걸터앉혔다.

    또 한 번의 미소를 교환한 우리는 서로를 껴안으며 더욱 거칠게 키스를 나눴다. 그녀의 숨이 조금 더 거칠어지는 것을 느낀 나는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은 티셔츠 위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 한쪽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짧게 숨을 헐떡였다. 그 반응에 이성의 끈이 풀린 나는 지금 이대로 만족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입을 맞추며 손을 더듬어 그녀의 티셔츠를 배꼽부터 잡고 위로 올렸다. 촉감으로 속옷의 형태를 추정해 보건대 후크가 등 쪽이 아닌 앞쪽의 양 컵 사이에 있는 형식인 것 같았다. 흔치 않은 방식이라 눈으로 보지 않고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내 입을 떼고 고개를 숙여 속옷을 확인하려 했다.


    "...!"



    엄마야, 깜짝이야.

    그녀의 명치 부근에 굉장히 거친 느낌의 바다코끼리 문신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무 예고 없이 내 시야를 독차지한 바다코끼리는 '크어어'하고 울부짖는 듯 용맹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의 등장이었지만 나는 이 멕시코 청년 무리들이 대학교 필수 교양과목처럼 문신을 기본 장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다듬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온전히 표정을 조절해 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바다코끼리 가죽의 거친 질감과 배를 가득 채울듯한 사이즈가 어마어마했다는 점이 쉽지 않았다. 그녀도 당황한 듯했지만 일단 나를 따라 웃었다.


    "맥주 가지러 갔다더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짜증 섞인 부름에 뒤돌아보니 백 룸 입구에 서 있는 레게머리남이 보였다. 원체 두툼한 그의 입술은 뭐가 불만인지 더욱 튀어나와 있었다.

    녀석, 혹시 아만다를 마음에 두고 있었나?

    아만다는 황급히 올라간 티셔츠를 손으로 내렸다. 그런 그녀를 등으로 가려주며 내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코로나 맥주 가져가면 되지?"


    레게머리는 대답도 않고 먼저 획 돌아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맥주를 왕창 챙겨서 잠시 비워두었던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아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을 느꼈다.

    무슨 일 있었나? 무슨 일이야 나와 아만다 사이에 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왜 또 이런담?

    그러나 그들 입장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친구들끼리 놀러 왔는데 한 친구만 이탈해서 다른 무리의 이성과 놀아나는 것을 받아주는 사람도 있는 반면, 배신이라 느끼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이 친구들은 멕시코의 밝은 미래를 책임질 모범생들이었다. 학업으로 인해 이런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에 자주 노출되지 않았었다면 충분히 불쾌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미안함의 감정이 들었다.

    나와 함께 복귀한 아만다의 표정도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은 당연했다. 이런 분위기를 읽지 못하면 사교성이 매우 떨어지거나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편이니 애초에 이 무리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내 좋은 표정이었던 스킨헤드녀의 표정도 어딘가 좋지 않은 것을 느낀 나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걱정 마, 얘들아! 인간 비타민 정진이 간다!

    나는 아까의 반응 좋은 화제를 이어서 살려보기로 했다. 우선 시작은 어색한 웃음으로 분위기 전환의 문을 열었다.


    "아하하하하…”


    그러나 웃음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그나저나 모르싸 말이야. 대장이 여자라는 거 알아? 나는 그게 너무 멋있더라고."


    다행히 내가 매우 적절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꺼낸 건지 그제야 아만다와 친구들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어, 이게 통하네?

    거기에 더욱 신난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어마어마하게 잔악무도한 여자라니. 나는 그런 여자랑 결혼하면 정말이지 도망가고 싶을 것 같아, 안 그래?"


    동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스킨헤드남을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내가 너무 친한 척을 해서일까 그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나, 난 좋은데?"

    "그래? 아, 아하하하, 하긴 뭐 모든 건 개인 취향에 달려있지 그래. 요즘은 정치적 올바름의 세상이잖아?"


    나는 어색한 웃음소리가 더욱 도드라지게 들렸다. 하지만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아무래도 인간 비타민의 약발은 여기까지인 것인가? 이제 슬슬 난감함이 감당 불가능한 선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건 좀 곤란한데…

    이 정도 분위기라면 자리를 박차고 그냥 집으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러기에 딱 적당한 정도였다. 하지만 내 발걸음을 붙잡는 것이 있다면 바로 아만다 사이프리드였다. 내가 오늘, 지금, 자리를 피한다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스스로 한 질문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멕시코에서 휴가를 왔다는 운명의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때 나를 구해준 건 스킨헤드녀였다. 그녀는 우락부락한 모습과 다르게 알프스 산골 소녀의 수줍은 말투로 말했다.


    "너 스페인어 잘 모른다고 했지? 그럼 모르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새로운 주제로 다시 대화의 물꼬를 터준 그녀가 고마워 나도 적극적으로 대화를 받아주었다.


    "응, 스페인어는 정말 잘 몰라. 무슨 뜻인데? 뭐, 제왕? 이런 단어려나?"

    "모르싸는 스페인어로 '바다코끼리’라는 뜻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시선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티셔츠에 가려진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명치로 향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하고 황급히 시선을 위로 올렸는데 마침 아만다의 눈과 딱 마주쳐버렸다. 그녀의 눈에도 당황스러움이 비치는 것 같았다. 아마 그녀의 눈에 들어온 내 모습도 비슷할 것 같았다.

    적잖게 당황했지만 나는 재빨리 스스로 진정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솔직히 아름답고 연약한 그녀가 마약 조직인 모르싸와 관련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거기다 그녀는 똑똑한 수의예과 학생이었다. 또, 객관적이고 심미안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녀의 숨겨진 바다코끼리 문신은 아름다웠고 미술적으로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냥 이뻐서 했겠지, 이뻐서.

    아까 보았던 늠름한 바다코끼리의 문신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눈이 보기에 예술적 느낌 충만한 이미지였음은 분명했다. 공부만 해오던 인생에 한 번 일탈을 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정리를 하니 지적인 아만다가 거기다 미적 감각까지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그녀가 더욱 좋아졌다.

    무사히 자기 합리화를 마친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정말 그 대장이란 여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조직이라는데 말이야. 자기 손으로 마약 공주에서 마약 여왕으로, 마약 여왕에서 마약 여제로 올라간 거잖아? 엄청난 능력이지."


    그런데 어째서! 도대체 왜 카르텔의 리더를, 그 흉악한 범죄자 새끼를 칭찬하자 그들의 표정이 다시 풀어지는 걸까?

    나의 여섯 번째 감각이 비상벨을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만다 사이프리드고 뭐고 갑자기 몹시 집에 가고 싶어진 나는 이들의 기분을 한껏 올려준 다음에 날래게 빠져나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쁜 예감은 무서우리만큼 정확하다.


    "거기다가 리더의 이름까지 아름다웠는데 말이야… 그 이름이 뭐더라?"


    아… 젠장, 이름이 뭐였지? 오늘 밤 가게를 나서며 차메로와 친구들이 속닥이던 대화에서도 들은 것 같았는데… 분명히 '카' 뭐였는데.

    확실히 이름에 '카' 가 들어가 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문제의 '카'가 이름의 어디쯤에 위치했는지와 나머지 이름들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 정도 고민하고 있으면 자기들이 대신 대답해 줄 법도 하건만 이들은 하염없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왜! 왜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거니들!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체를 좀 해보지!

    그들의 눈이 모두 내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압박감이 잔뜩 느껴지는 분위기에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아 결국 나는 '카'가 들어가는 여자 이름 하나를 억지로 골라서 입을 열었다.


    "안…젤리카?"


    상금 백만 불이 걸린 TV 퀴즈쇼 결승도 아니고 피 말리는 고심 끝에 답을 낸 나는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표정은 놀랍도록 굳어 있었고 나를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설마 정답인 건가?

    거기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신나서 다시 외쳤다. 검지손가락까지 위로 치켜들면서.


    "그래, 안젤리카!"


    뻑!

    뒤통수에 강한 통증과 충격이 느껴지며 내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풀리려는 것이 느껴졌다. 내 두개골을 진원지로 하는 충격음이 얼마나 컸던지 귀가 먹먹하고 머리통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범인을 확인했다. 묶음머리남이 어느새 내 뒤로 와있었다. 그의 냉랭한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의 나머지들을 보았다. 그때에는 이미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해 그들의 실루엣만 보일 뿐 얼굴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환청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 카타리나…"


    나의 정신은 과거로 돌아가 아까 라바나 저녁 테이블에서 들었던 대화소리가 들렸다. 차메로 일행의 목소리였다.

    아아, 내 기억력 좀 봐. '안젤리카'가 아니라 '카타리나' 였지, 참.


    쿵

    무릎이 바닥에 닿은 것이 느껴졌다. 하체를 울리는 충격과 함께 이번에는 다른 환청이 들렸다.


    "도전 백만 불의 우승자는… 안젤리카! 많은 박수 바랍니다!"


    퀴즈쇼 진행자의 목소리와 방청객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가 동시에 아득해졌다. 멀어지는 소리와 함께 어두워지는 시야로 아만다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파라이소의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도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표정을 읽기 전에 내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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